[투데이 窓]수능, 킬러 문항, 그리고 대입 혁신
1994학년도에 도입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교육개혁을 위한 조치였다. 통합교과적·탈교과서적 문제로 고차원 사고력을 평가함으로써 교과서 중심 암기와 숙달에 치우친 수업을 혁신하는 게 목표였다. 시험문제를 바꿔서 교육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하지만 공교육에 대한 대입제도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고육지책이다. 교육계도 수능의 도입을 반겼다. 미래세대에 필요한 창의적 융합역량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교과별로 엄격히 나누어 가르치는 수업관행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았고 학교수업을 통해 통합교과적 융합역량을 평가하는 수능에 대비하기가 어려웠다. 탈출구는 학원이었다.
수능은 대학교육에 필요한 수학능력을 갖췄는지 평가하는 도구다. 하지만 수능점수로 학생을 선발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수능은 학생을 선별(選別)하는 장치가 됐다. 많은 지원자 중에서 합격생을 골라내야 하니 시험의 난도(難度)와 변별력이 중요해졌다. 그래서 생겨난 게 '킬러문항'이다.
킬러문항은 교육과정에서 출제됐더라도 짧은 시간에 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난도가 높은 문항을 말한다. 긴 지문을 포함하고 실수를 유도하기 위해 문제를 배배 꼬아 낸다. 학생들은 재빨리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요령껏 답을 골라내야 한다. 필즈상 수상자 허준이 교수처럼 시간을 두고 명상하면서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영감을 얻는 인재는 풀기 어려운 문제다. 이런 문항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것은 학업성취나 역량수준을 평가하는 '교육적 선별'이 아니다. 일부 학생, 특히 상위권 학생을 골라내기 위한 '기술적 선별'이다. 당연히 문제풀이 요령을 알려주는 학원에 가야 하고 족집게 '일타강사'들이 추앙받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무엇보다 킬러문항 또는 준(準)킬러문항이 많아지면 비싼 사교육을 받는 고소득층 학생이 유리해진다는 점에서 '공정입시'는 불가능해진다.
킬러문항 때문에 시험을 망친 학생들은 보통 2가지 마음을 갖는다. 우선 분노다. 수능당국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수한 학생이면 풀 수 있는 문제를 냈다"고 말한다. 그러나 킬러문항은 의도적으로 소수학생만 맞힐 수 있게 만든 문항이다. 공교육으로 대비하기 어렵다. 이런 문항을 접한 학생들은 수능당국의 입발림에 분노하고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을 키우게 된다. 두 번째 부류는 자신을 질책하고 좌절하는 '착한' 학생들이다. 억지로 많은 학생이 틀리도록 낸 문제지만 "엄마, 아빠 미안해, 내 공부가 부족했던 것 같아"라고 자책한다. 그리고 재수, 삼수의 길을 걷는다. 킬러문항은 교육적 부작용을 넘어 사회적 병폐까지 낳는 셈이다.
킬러문항이 없으면 어떻게 학생을 선별하느냐고 묻는다. 우선 입시 전문가들은 '일타강사'에게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변별력을 가지는 문항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정책과 의지 문제라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대안은 시험점수 하나로 학생을 뽑는 대입제도를 혁신하는 것이다. 핵심은 학생의 꿈, 진로, 학업성취와 학습 이력을 살펴보는 '교육적 선별과 배치'를 강화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고 꿈을 위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교사들은 제자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학생부를 써야 하고 전문적인 입학사정관들이 꼼꼼히 읽고 선발하는 체제를 확대해야 한다. 이때 학생의 배경, 학교환경, 지역 특성까지 고려해서 학생이 가진 잠재력을 평가하면 마이클 샌델도 말한 공정한 입시가 된다. 이런 대입제도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꿈과 끼를 발현하고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초저출산 시대의 인재양성 전략과 맞닿아 있다.
킬러문항과 사교육비 문제에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참에 수능문항의 출제방식 변화를 넘어 대입제도 전반의 혁신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길 바란다. 언제까지 미래세대를 시험에 묶어둘 것인가.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서울시 교육명예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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