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깨알 리더십’, 조선 몰락에 영향… 윤 대통령은?

한겨레21 2023. 6. 28.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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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정치 평행이론]정조의 확신에 찬 리더십, 사안마다 개입해 신하들은 왕만 보았다… 윤 대통령의 강한 자신감도 부정적 영향 주나
윤석열 대통령(왼쪽)은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발언하는 면에서 정조와 닮은 면이 있다. 자칫 지도자의 확신은 시스템을 해치는 결과가 된다. 대통령실 사진기자단

“왕은 성인(聖人)이셨다.”

1800년 음력 10월, 이조참판 윤행임은 그해 여름 사망한 국왕 정조에 대한 묘지문을 지으면서 최종적으로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당대 사람들이 정조를 어떻게 봤는지 알게 해주는 기록이다. 사망한 국왕을 좋게 평가하는 것이 조선왕조의 관례이긴 하나 정조처럼 ‘성인’이라는 극진한 표현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정조의 정치는 정조만 할 수 있어

정조는 왜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았을까. 국왕으로서 정조는 감탄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인물이었다. 스물다섯의 청년으로 즉위해 마흔아홉의 장년으로 사망할 때까지 24년간 시종일관 부지런했고 국왕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즉위하자마자 왕실 재산의 제도적 통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회계체제를 명확히 했고, 조세체제를 개선했다.

정조는 선왕 영조 말년 왕실 외척 위주로 국가가 운영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자신의 외가인 풍산 홍씨,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인 경주 김씨 가문의 신하들을 쫓아냈다. 세손 시절부터 즉위 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이 문제인지를 깊이 고민한 흔적이다. 재위 동안 지방 수령의 관리·감독을 강화했고 끊임없이 암행어사들을 내려보냈다. 관리·감독 강화는 필연적으로 꾸준한 관심 없이는 안 된다. 정조는 유능하면서도 성실한 행정가였다. 신해통공이라는 조처로 당대 조선의 상권을 쥐고 있던 시전 상인들의 힘을 줄이기도 했다.

정조의 어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국왕으로서 정조는 뚜렷한 성취를 보였지만 정치가로서 정조는 그렇지 못하다. 정조의 정치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특수한 형태에 가까웠다. 정조는 자신만만한 인물이었다. 유학자로서 뛰어나 여러 책을 지었고 그 수준도 매우 높았다. 경연장에서 여러 차례 신하들이 의례적인 표현이 아닌 진심으로 왕의 학문에 감탄했다. 수많은 경전을 외워야 합격할 수 있는 과거를 상위권으로 통과한 그 신하들이 말이다.

그러다보니 정조의 정치는 시종일관 ‘집중’과 ‘교화’의 성격을 띠었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확신이 있었다. 조선왕조 시절 ‘언론’의 역할을 한 것은 이른바 ‘삼사’라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리들이었는데 정조는 이들 관리의 발언 수위나 태도 등을 자주 문제 삼고 그들의 활동을 막곤 했다. 심각한 당파싸움에 이들 삼사도 ‘무기’로 동원되자 내려진 결정이지만 동시에 자기 판단에 확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정치는 과도할 정도로 한 개인에게 권한이 집중된다. 정조는 사안 하나하나에 개입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소설을 싫어한 그는 여러 차례 소설 같은 ‘잡스러운’ 문체를 쓰지 말라 지시했고, 책 크기가 너무 작은 것을 문제 삼기도 했다.

무엇이든 대통령이 지적하면 사회는

정치 지도자의 강한 자신감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정치 상황에 따라 리더십의 척도는 달라진다. 당대 조선의 현실 속에 정조의 리더십이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이렇게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이 사라지게 될 때다. 대체재가 없는 상황에서 개인이 사라지는 순간 체제의 모순은 극대화된다. 정조 사후 조선왕조가 안동 김씨로 상징되는 일부 가문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세도정치’로 접어드는 게 이 때문이다. 정조는 분명 뛰어나고 훌륭한 군주였지만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바꾸지 않았고 그 부작용은 그가 죽으면서 곧바로 드러났다.

정조 이후 조선왕조가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은 ‘오롯이’ 혼자 감당하려 했던 그의 정치 스타일에 일부분 책임을 물어야 하는 측면도 있다.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이 중요한 이유는 그만큼 국가 운영에 끼치는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리더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아랫사람들이 반응하고 이에 따라 사회는 변화한다. 변화한 사회가 다시 변하는 데 또 오랜 세월이 걸린다. 지도자의 언행이 중요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200년이 지난 지금 윤석열 대통령의 언행에서 강인한 자신감을 보고 정조를 떠올린 이유다. 윤 대통령의 언행이 잘못됐다거나 그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확신’이 관료를 비롯한 전체 사회에 퍼지는 영향을 말하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정치 문법에서 핵심은 본인의 강력한 의지다. 여러 차례 윤 대통령은 현안에 대해 자기 생각을 뚜렷하게 밝혔다. 2023년 3월 국무회의 석상에서 윤 대통령은 20분 넘게 한-일 관계와 노동시간 개편안 등 당대 현안에 대해 자기 생각을 말했다. 윤 대통령이 사석에서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다변을 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졌다. 최근 빚어진 대학수학능력시험 문항 사태도 윤 대통령의 지적에서 비롯됐다.

실무자는 언제나 ‘윗선’만 보게 된다

지도자의 확신은 결과적으로 수동화하는 반응으로 이어진다.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힘이 많이 쏠릴수록 실무자는 스스로 결정하기보다 ‘윗선’의 결정만 지켜보게 된다. ‘윗선’의 결정을 그대로 진행하려는 모습만 보인다. 윤 대통령의 최근 언행에서 감지되는 것 중 하나는 사안에 대한 세세한 언급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문항 난이도 문제를 놓고 참모들에게 “수능 ‘킬러 문항’은 약자인 아이들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사소한 일도 ‘용산’에 몰리는 일이 늘어나게 된다.

‘깨알 리더십’은 좋은 방안일 때가 있다. 상황에 맞춰 아랫사람의 행동을 끌어내는 것이 리더십의 요체라면 구체적인 지침이 효과적이다. 문제는 ‘적절함’이다. 세세함과 대범함을 상황에 맞춰 적절히 구사할 줄 아는 것도 리더십의 요체다. 모든 것을 자신이 안으려 해 ‘성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남기는 것에 실패한 정조의 일생이 가르쳐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이도형 <세계일보> 기자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언론사 정치부에서 국회와 청와대 등을 8년간 출입한 이도형 기자가 역사 속에서 현실 정치의 교훈을 찾아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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