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무(無)학과’ 대학
일본은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25명에 달하는 기술강국이지만 2000년대 이후 연구·개발(R&D) 실적이 추락했다.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일본의 연구실적 점수는 3185점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인 중국(1만6753점)에 크게 못 미치는 5위에 그쳤다. 인구 대비 박사학위 취득자도 주요 7개국 중 6위로 한국(3위)보다 적다. 일본 내에서는 “ ‘인재입국’ 모델이 흔들리고 ‘저학력국’이 돼가고 있다”고 우려한다.
버블경제의 붕괴 영향이라는 진단도 있지만 인문학자 우치다 다쓰루는 문부과학성의 실패한 대학 구조개혁인 ‘도야마 플랜’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저출생으로 학생 수가 줄어들자 일본은 2004년부터 대학에 시장원리를 적용해 국공립 대학을 통폐합하고 경영성과에 따라 대학을 차등지원했다. 취업률을 비롯한 획일적 평가기준에 맞추느라 대학의 학문적 고유성이 흔들렸다. 2015년엔 ‘돈 안 되는’ 인문사회계열에 대한 구조조정 시도가 논란이 됐다. 우치다는 “자유로운 연구가 이뤄질 수 없는 환경에서 혁신이 일어날 리 없다”고 말한다.
교육부가 28일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대학 기본조직을 학과·학부로 정의한 규정을 71년 만에 없애고 자율전공으로 수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학과가 없는 대학이 등장하는 셈이다. 비인기학과로 꼽히는 기초학문의 위기는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청년 고용시장 한파 때문에 특정 과목 쏠림이 우려된다. 정부가 학령인구 급감, 지방 소멸, 대학 서열화, 지방대학의 존폐 위기가 얽히고설킨 고등교육 개혁 난제에 시장원리를 내세워 방치를 택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최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대학 구조개혁을 유도하려면 졸업생의 취업률·연봉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국력의 바탕인 학문 생태계는 숲처럼 긴 호흡으로 기르고 가꾸는 것이다. 이날 발표된 영국의 글로벌 대학평가기관 QS의 올해 세계대학평가에서 한국 대학 5곳이 100위 안에 들었는데 일본(4곳)보다 많다. 이번 대학개혁이 일본처럼 실패한다면 순위는 언제 뒤집힐지 모를 일이다.
최민영 논설위원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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