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격전지 포천 ‘온몸으로 방어’…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상흔 [잊지 않겠습니다 '호국영웅']
첫 공격 대상 된 포천… 치열하게 방어 전투
포천은 6·25전쟁 개전 초기 최대 격전지였다. 창수면과 영중면, 일동면 등지는 북한군 탱크와 전차 등의 포격을 집중적으로 받은 곳으로 여전히 그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다. 포천시 43번 국도변 신북면 기지리로 향하다 만난 특이한 구조물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전차와 탱크를 앞세워 내려오자 국군이 열악한 군사장비와 온몸으로 적을 방어했던 ‘포천방어벙커’(경기도 근대문화유산 등재)다. 여러 발의 포탄 자국으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녹슬고 파괴된 콘크리트 철근에 누군가 태극기와 조화를 걸어 놨다.
■ 필사의 지연작전 격전지, 신북면 기지리 포천방어벙커
6·25전쟁 발발 전 포천 북쪽 영평천 넘어 당시 북한 쪽에 살고 있던 임석환씨(90)는 당시의 실상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매년 이맘때 38선 인근을 찾아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리고 있는데 포천방어벙커에서 발길을 멈추고 거수경례를 한다. 먼저 간 전우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북한군은 1950년 6월25일 전차와 장갑차 등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43번 국도를 따라 남하했다.
첫 공격 대상이 된 포천은 국군 제7사단이 38선 경계근무를 맡고 있었고 정면에는 제9연대가 배치돼 있었다. 북한군 병력은 제105전차여단의 지원을 받는 2개의 정예 사단이었고 그중 제3사단이 포천 방향으로 공격했다. 결국 1950년 6월25일 오전 포천은 점령되고 시내까지 북한군이 진입한다. 북한군 제3사단은 이날 새벽 38선을 돌파, 10㎞ 남쪽 만세교까지 돌입했다.
하지만 국군도 치열하게 방어 전투에 임했고 상흔은 여전히 남아 있다.
포천시 신북면 43번 국도변 대전차 벙커인 포천방어벙커는 북한군의 공격으로 포탄 자국이 선명한 채 전쟁유산으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 북한군 전차와 탱크, 로켓포 등으로 응수한 만세교 치열한 격전지
국군은 빠르게 남하하는 북한군을 맞아 치열하게 싸웠다.
대표적 격전지가 포천 만세교 부근이다. 아군은 이곳에서 2.36인치 로켓포로 응수해 만세교를 사수하려고 애썼다.
1950년 6월25일 오전 8시를 전후해 북한군이 43번 도로를 따라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을 때 만세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아군 포는 적 전차에 간혹 타격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전력의 열세를 감지한 국군의 대전차포 병사들은 조준경만 빼 들고 신평리 쪽으로 급히 철수했다.
북한군은 결국 저지선을 돌파해 진격했고 이때가 오전 9시40분께였다. 결국 만세교 부근 지연전은 2시간을 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 6·25전쟁 첫 전초전 촉발지 창수면 추동리, 제9연대 방어전투
전쟁 발발 전 포천 창수면은 국군과 북한군이 대치하던 곳이다.
개전 첫날 포천 북방 38선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9연대 제2대대는 창수면 추동리와 일동면 사직리 일대에서 북한군 제3사단 예하 부대의 공격을 받는다. 북한군은 6월25일 오전 3시40분을 전후해 공격준비 사격을 아군에게 가했다.
결국 아군 기관총 진지를 제외하고 모든 교통호가 파괴되면서 사상자가 속출하는 등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됐다.
당시 북한군 제3사단은 공격준비 사격을 계속하며 전방 2개 중대의 방어 전면으로 전차를 앞세워 공격했다.
적 전차 3대가 양문교 부근까지 진출하면서 아군의 방어 진지를 유린했고 아군 제7중대는 국도 43호선을 적에게 넘겨주고 823고지 서쪽 능선으로 후퇴했다. 추동리(창수면)와 사직리(일동면)에서도 한 차례 교전했지만 북한군은 아군 방어진지 후방의 5㎞까지 포격을 집중하며 공격했다.
국군 제9연대는 북한군 제3사단을 맞아 방어했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많은 병력을 잃은 채 후퇴했다.
■ 의정부를 사수하라! 송우리 방어전투
북한군은 의정부로 돌진하기 위해 현재의 포천시 소흘읍 송우리에 당도했다.
당시 수도경비사 예하 제3연대 연대장을 맡고 있던 이상근 중령은 급하게 편성된 혼성 부대를 이끌고 포천 송우리 일대에서 방어작전을 전개했다.
해룡산 동남쪽의 178고지를 지켜내기로 하고 송우교를 중심으로 좌우 측에 각각 2개 중대 병력을 배치하고 진지 작업을 벌였다. 제1대 대장 임백진 소령은 동쪽 2개 중대, 제3대 대장 김봉상 소령은 제11중대를 포함한 서쪽 3개 중대를 각각 지휘하며 방어 태세를 갖췄다.
당시 전차 7, 8대를 앞세운 북한군 기계화 부대가 연대 방어 정면으로 다가오자 아군의 57㎜ 대전차포 3문과 2.36인치 로켓 포반이 공격을 개시해 적 전차를 명중시켰다.
하지만 워낙 막강한 북한군의 전차와 기계화 부대의 화력이었기에 아군 방어벽은 무력화되고 말았다.
포천은 6·25전쟁을 겪으며 몇 차례 주인이 뒤바뀌는 상황이 전개됐다. 다음 해(1951년 3월) 포천은 아군의 재반격으로 되찾았다.
■ 군인보다 더 강한 군번 없는 영웅, 포천 독수리유격대원들
독수리유격대는 남들은 피란가는데 적의 소굴이 된 포천으로 뛰어들었다. 서울 수복 직후 1950년 11월 포천 일동에서 활약한 이들은 자생 민간인유격대로 최종성과 최종철 형제를 비롯한 63명이 결성했다.
장총과 M1 소총 등으로 무장했고 포천이 수복되자 독수리유격대는 이동면 등 도평리 백운동 일대와 약사골 등에서 공산군 패잔병들을 소탕했다.
포천군 신읍리(현 포천시 신읍동)에서 조직해 육군 제2사단 17연대·32연대에 합류해 경북 의성·청송·안동·예천·풍기, 충북 제천과 단양 등지에서 싸웠고 북한군 제10사단과 공비들을 토벌했다.
16명이 전사했지만 정식 군인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하다 이후 공적을 인정받고 있다.
6·25전쟁 당시 3대 민간저항부대로 인정됐다. 독수리유격대장 최종성과 작전관 최종철의 유해를 모신 포천시 이동면 관음산 기슭에 독수리유격대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인터뷰 임석환 6·25참전유공자회 포천시지회 지회장
"15세에 참전… 사선 넘나든 고행길"
임석환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포천시지회장(90)은 6·25전쟁 발발 전 38선 이북 지역에 살며 전쟁 준비 상황을 직접 목격했고 피란길에 오른 후 국군으로 전쟁에 직접 참전해 싸웠다.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 임 지회장의 나이는 15세였다.
그가 6·25전쟁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1950년 12월 두 살 많은 친형과 함께 서울에 와 정처 없이 떠돌다 국군에 자원 입대하면서부터다.
입대 후 부산으로 이동해 한 초등학교에서 잠시 머물다 제주도에서 8일간의 짧은 군사훈련을 받고 본격적인 전투에 투입된다. 이후 강원도 인제 35연대에서 M1 소총을 비롯해 수류탄, 박격포 등을 나르며 전쟁이 무엇인지 감지하게 됐다.
당시 중학교까지 졸업한 사람이 드물었기에 그는 중졸자로 대대장 전령병이 됐다. 지도를 볼 줄 안다고 말하자 연락병으로 결정돼 복무하며 물자를 보급하는 노무자들과도 잘 지냈다.
치열했던 강원 철원 백마고지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또다시 병원으로 후송되는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1953년 휴전이 될 때 까지 수도기계화보병사단 기갑연대에 배속돼 근무하다 1958년 7월 상사 계급으로 8년간의 사선을 넘나드는 인고의 고행길인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인터뷰 사선을 넘고 살아 돌아온 노병 김응태옹
"참혹했던 전쟁터… 살기 위해 싸워"
포천지역 6·25참전 유공자로 지난 1968년부터 영북면 운천 전통시장에서 지물포를 운영하고 있는 김응태옹(92)은 여러 곳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되기를 몇 차례. 드디어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1952년 전쟁통에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한 그는 태어난 춘천에서 포항을 거쳐 제주도에서 96일간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강원도 속초 신설 부대로 배치돼 전투를 치렀다
“김화지구전투, 백마고지전투 등에 참전했는데 1952년 12월 최전방은 무척이나 추웠고, 다음 해 2월 어느 날에는 추위 속 비까지 내렸는데 근무자들이 방공호에서 근무 중 졸다가 적군의 포탄에 모두 전사했어요. 전우들의 시신을 끄집어낼 때 정말 비참했습니다”
전쟁터 환경은 언제나 그렇듯 참혹하지만 김옹이 겪은 전쟁의 참화는 실제 사선을 넘나들며 겪어본 사람만이 느끼는 특별함이 존재한다.
그는 전장에서 목격한 묘한 장면도 기억해낸다.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이뤄지는 사이 고지전에 투입됐던 살기 위해 싸웠고, 심지어 적군의 시신을 뒤져 음식물을 먹기도 했다.
휴전 이후에는 잠시 포천 일동면 지역의 9사단 30연대에 근무하기도 했고 당시 열악한 여건으로 야전삽을 이용해 나무와 풀 등 자연 재료만으로 군 막사를 지은 기억이 생생하다.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한 세 살 위 친형의 사진과 자신의 빛바랜 전쟁 중 병영생활 사진을 수첩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김옹은 사병으로 입대해 하사로 전역했다.
사선을 넘은 노병은 이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영북면 한 전통시장의 터줏대감으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홍순운기자 hhsw8899@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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