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언어의 상실
[숨&결]
[숨&결] 박성민 | 전 청와대 청년비서관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고, 믿음의 세기이자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면서도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지만 절망의 겨울이기도 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전 찰스 디킨스의 책 <두 도시 이야기>에 나온 첫 문장을 접했다. 읽으면서 ‘요즘 세상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세상은 이분법의 감옥에 갇힌 것 같다. 세상만사 무 자르듯 단숨에 두 동강 낼 수 없는 일들이 대부분인데도 국민은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용산과 여의도의 권력자들이 나서서, 실재하는 회색 지대는 지우고 흑과 백, 양자택일의 세상으로 탈바꿈시킨다. 국민의 판단을 돕는 제대로 된 근거를 제시하는 사람들은 적고, 정치인들은 대화와 타협, 설득을 위한 화술이 아닌 공격을 위한 말재간을 늘려갈 뿐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청문회에서 ‘이모 논란’ 등 한심한 실수를 연발하며 국회의 권위와 정치인에 대한 기대를 떨어뜨린 더불어민주당의 서글픈 활약상, 군기 잡는 대통령 눈치나 보며 ‘입시비리 수사를 많이 해서 대통령은 입시 전문가’라고 아부하는 국민의힘의 애잔한 활약상 속에 정치가 우스워진 건 덤이다. 심지어 서로는 서로를 한심하게 생각한다. 여당은 야당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등에 대한 타당한 문제제기를 ‘괴담’ ‘선동’으로 치부하며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하고, 야당은 여당의 정책 기조를 뒤집을 만한 정책 어젠다를 개발해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가장 착잡한 건 이걸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의 마음이리라.
우리의 정치는 언제부터, 왜 이렇게 길을 잃었나.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원료인 언어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민주주의의 가치와 의미를 구현하는 가장 효과적 도구는 정치인의 말이다. 언론을 통해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수 정치인은 제대로 대화하는 법을 잊은 사람들처럼 군다. 21대 국회 임기가 끝나 가지만 ‘양질의 질문’을 던진 이들은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 정도만 기억에 남는다.
제대로 된 질문과 답변을 고민하는 이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니 토론이 없고, 숙의의 정신도 사라진 지 오래다. 토론이 아닌 윽박, 설명이 아닌 변명에 그치는 정치 언어만이 보일 뿐이다.
사실 그들도 나름의 사정은 있을 것이다. ‘짧고, 선명하고, 강렬한 것’이 잘 팔리는 시대다. 대중은 차곡차곡 쌓아 올린 미괄식 글이 아닌 세줄로 요약된 요약본을 더 찾는다. 전체 영상이 아닌 하이라이트만 편집한 쇼츠 영상 선호도가 나날이 높아져 간다. 이런 소셜미디어 생태계 속 ‘조회 수’, ‘좋아요 수’가 수익을 창출해내고 상품성을 증명한다. 이런 소셜 생태계의 질서로부터 정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다. 정치인들은 수익성을 추구하는 건 아니지만, 기사화를 통한 인지도의 확대만큼 정치인에게 강력한 유인도 없다. 지지자들과 국민으로부터 인정받는 데 ‘강렬한 한방’만 한 게 없다.
문제는 방식과 내용이 합리적이지 않은 ‘한방’은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옴에도, 철저한 준비 없이 그냥 ‘한방’만을 탐하는 얄팍함이 대세가 돼버렸다는 점이다. 갈수록 공고해지는 대립 구도 속에서 따끔한 공격 한방이 갖는 매력은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극단의 언어를 사용할수록 진영이나 이념에 매몰된 편가르기 논리는 강화되고, 악을 상정하거나 공동체로부터 일부를 배격해 결속력을 강화하면서 폐쇄성은 더욱 공고해진다. 건전한 토론이나 그에 바탕한 확장성은 더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된다.
어떻게 해야 민주주의의 언어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었다”(<두 도시 이야기>)를 소설 속 문구로 남겨두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지나친 낙관이나 맹신으로 점철된 극단의 언어가 아닌, 충성이나 줄서기의 언어가 아닌, 논리와 근거, 철학과 가치를 딛고 선 언어가 피어난 정치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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