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희칼럼] 킬러문항 없애면 사교육 킬?
몰락한 공교육·학벌주의 두고
학원·일타강사만 때려선
사교육 철옹성 깰수 없어
아들이 고3이었을 때 치른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역대급 불수능이었다. 특히 국어는 그야말로 '킬러 문항'이 수험생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시험이 어려울수록 표준점수가 높아지는데 그해 원점수 100점의 표준점수는 149점까지 치솟았다. '불국어'라는 아우성에 당시 문제를 풀어봤었다. '국문학 전공자'라는 자만은 이내 좌절로 바뀌었고, 시쳇말로 '타임 어택(시간 부족)'에 시달렸다. 헤겔의 변증법을 주제로 한 철학 지문과 브레턴우즈 체제, 기축통화, 트리핀 딜레마 등이 등장하는 경제 지문과 선지는 그 난해함과 배배 꼬아놓은 정도가 멘붕을 부르는 수준이었다. 독해력, 추론 능력을 평가하겠다는 것인데 배경지식 없이는 풀 수 없는 문제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정 수능' 이슈를 쏘아 올리면서 교육부가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핀셋 제거하기로 했다. 수능을 불과 5개월 앞둔 시점이어서 정책 타이밍은 아쉽지만,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다면 킬러 문항 배제는 대환영이다. 그러나 킬러 문항을 없앤다고 해서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증인 사교육이 잡히는 것은 아니다. 킬러 문항 말고도 사교육 수요는 널려 있다. 유치원·초등 예체능에서 시작해 중·고교 내신, 대학 입시까지 '사교육 라이프'는 근 20년간 이어진다. 사교육 때문에 부모 등골이 빠진다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영재고·특목고를 준비할라치면 좀 더 빨리, 좀 더 많은 돈을 투입해야 한다. 지금의 사교육 광풍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사교육의 노예가 되는 것은 대학 입시 한 방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사회 구조 때문이다. 학벌주의, 대학서열화 등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어 문제 몇 개 바꾼다고 이 난장판이 달라질 리 없다.
광풍의 현상과 원인을 정교하게 진단한 후 개혁 방향과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으면 사교육 '킬'은 요원하다. 의욕이 앞서 서두르다 보면 엉뚱한 데로 불똥이 튈 수 있다. 여권 일각에서 고소득 일타강사를 '사회악'이라고 저격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 그것. 그러나 일타 강사를 악마화하는 것은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교육계뿐 아니라 경제계, 연예·스포츠계에도 슈퍼스타가 존재한다. 1981년 경제학자 셔윈 로즌은 '슈퍼스타 경제학'이라는 논문을 통해 '승자독식 현상'이 왜 벌어지는지 설명했다. 핵심은 '대체 불가능성'에 있다. 일타강사는 정글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강자들로, 강의력·교재의 수준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인터넷 강의'라는 문명에 올라타면서 전국구 스타가 됐다. 일부 일타강사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고급 아파트나 차, 시계를 자랑하는 것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이들이 적법하게 돈을 벌었다면 문제될 게 없다. 문제가 있다면 아사리판 사교육에 주도권을 내준 열악한 공교육에 있다.
정부가 '사교육과의 전쟁'을 하려면 공교육이 왜 밀리고 있는지 원인부터 따져봐야 한다. '잠자는 교실'의 일상화 등 공교육이 붕괴됐지만 위기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교사들의 실력이나 열의는 일타강사와 경쟁이 안 된다. 교육부가 최근 '공교육 경쟁력 제고방안'을 발표했지만 졸속으로 내놓다보니 재탕이다. '잘 가르치는 교사 우대' 등의 방안이 포함됐지만 일타교사에게 어떻게 보상하겠다는 건지 구체적 계획이 없다. 교사들의 잡무를 줄여 수업에 전념하게 하겠다는 교육청의 약속도 수년째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학부모들은 '공교육을 살리겠다'는 정부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럴수록 단호한 의지로 몰락한 공교육을 바로 세워야 한다. 부실한 군대를 이끌고 사교육과의 전쟁에 나서서는 이길 수 없지 않은가. 고착화된 학벌주의, 대학서열화 등 사회 인식도 개선해나가야 한다. 갈 길이 멀지만 사교육 척결은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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