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담만 주고 받는 사이"…과방위, 여야 정쟁에 '식물 상임위' 위기
"만나서 의사일정을 논의해야 하는데 성명서로 필담만 주고 받고 있는 상황이죠."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가 '식물 상임위원회'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과방위원장이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에서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으로 바뀐 이후 여야 간 갈등이 더욱 첨예해지며 파국으로 치닫고 있어서다. 정쟁 소용돌이에 각종 쟁점법안들이 표류하며 '한국형 나사(NASA)'로 불리는 우주항공청 설립, 지속가능한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위한 고준위방사성폐기물(고준위방폐물) 처분 부지 선정 등 과학기술 사업들의 '골든타임'을 자칫 놓칠 수 있단 지적이다.
28일 정치권에 따르면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리기로 예정됐던 과방위 전체회의가 취소됐다. 당초 신임 과방위원장인 장제원 의원이 주재하는 첫 회의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 등의 업무보고를 받고 주요 법안들을 의결키로 계획했지만 전날(27일) 늦은 저녁 일정이 취소됐다. 여야 간사 간 일정 협의도 원활하지 않은 터라 이번주 내 전체회의 개최 가능성이 높지 않은 만큼, 사실상 장 의원의 상임위 등판은 7월에나 가능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올해 상반기 내내 꼬리표처럼 붙었던 식물 상임위 오명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국회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이달까지 과방위가 전체회의를 개최한 횟수는 5회로 17개 상임위 중 여성가족위원회(여가위·3회)를 제외하고 가장 적다. 소관부처가 여성가족부 뿐으로 업무범위가 좁은 여가위와 달리 과방위는 과기정통부, 원안위, 방송통신위원회와 해당 부처 소관 83개 기관까지 담당하는 등 과학기술·방송 관련 정책과 입법을 모두 도맡고 있단 점에서 사실상 꼴찌 상임위나 다름 없는 셈이다.
이에 대해 한 여당 과방위 관계자는 "전체회의가 5번 열렸다곤 하지만 최근 두 번은 여야 대립 속 안건도 없이 말 그대로 열리기만 한 회의 아니었느냐"라고 했다. 실제로 지난 22일과 26일 개최된 전체회의는 야당인 민주당 주도로 안건 상정 없이 열렸는데 위원장인 장제원 의원을 비롯해 여당 과방위원들은 여당 간사로 위원장 직무대리를 맡은 박성중 의원을 제외하고 전원 불참했다. 이 중 26일 전체회의는 개의 약 1분30초 만에 산회가 선포됐다.
식물 과방위는 여야 협치가 실종된 탓이 크다. 각종 쟁점현안을 두고 여야가 상임위에서 치열하게 맞서는 것은 당연하지만 유독 과방위만 파행하는 경우가 잦다. 일각에선 방송 관련 의제를 다루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과방위는 지난 3월 공영방송 이사회 구성과 사장 선임 절차를 바꾸는 내용을 담은 '방송법 개정안' 등 이른바 '방송 3법'의 본회의 직회부를 놓고 여당이 퇴장한 채 야당이 단독으로 통과시키며 큰 갈등을 빚었고 이후 약 두 달간 전체회의가 열리지 않는 '개점휴업' 상태가 이어졌다.
여론형성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을 놓고 여야가 현격한 견해차를 보이고 있는데, 총선을 1년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관련 논의가 더욱 민감해졌다는 것이다. 한 민주당 과방위 관계자는 "야당은 방통위원장 지명이나 KBS 수신료 분리징수에 대해 현안질의를 하자고 주장하고 있는데 여당이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했다.
실제로 장제원 의원이 신임 과방위원장으로 선출된 이후 여당은 대통령 국정과제로 과기정통부가 연내 개청을 거듭 요청하는 '우주항공청 특별법'(우주항공청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 제정안)부터 처리하자는 입장인 반면 민주당이 방송,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현안질의가 먼저라며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와 관련 장제원 의원은 전날 "우주청 특별법 처리 일정에 합의하면 민주당이 요구한 현안질의를 언제라도 실시하겠다. 그러나 민주당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민주당 과방위 관계자는 "의사일정에 대한 논의도 없이 성명으로 필담만 주고 받는데 합의가 되겠느냐"라고 했다.
정치권 안팎에선 식물 과방위가 지속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민주당 과방위원들이 이날 독자적으로 원안위 현안 간담회를 여는 등 장외활동에 나선 데다 신임 방통위원장에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이동관 대통령실 특보가 지명될 경우 이 특보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새로운 과방위 파행의 화약고가 될 수 있단 점에서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정책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당장 우주항공산업 콘트롤타워 역할을 하게 될 우주청 연내 개청은 사실상 물 건너 갔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고준위방폐물 처분부지 확보를 위한 고준위방폐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 제정안도 무산될 위기다. 현재 한빛원전 등 주요 원전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 시설이 조만간 포화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21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원전 가동을 멈춰야 할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 과방위 여당 의원은 "시급한 법안이 많아 빨리 처리해야하는데 답답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 mok@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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