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의 기억’을 ‘승리의 기억’으로···반란 사태 왜곡하는 ‘푸틴 극장’
“여러분이 완전한 혼돈과 내전으로부터 조국을 구해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7일(현지시간) 크렘린궁에서 군인들을 만나 이 같이 치하했다. 러시아 관영 언론들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푸틴 대통령은 도열한 군인들 앞에 놓여진 책상에 앉아있고, 그 뒤에는 러시아 국기와 18세기 러시아 황제 표트르의 동상이 눈에 띈다.
뉴욕타임스(NYT)는 책상에서 열심히 일하는 현대적 대통령의 모습과 러시아 제국의 장엄함이 결합된 이미지라면서 ‘안정의 수호자’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신들은 이를 두고 선전에 능한 ‘푸틴 극장’이 다시 시작됐다고 표현했다. 2000년 푸틴 대통령 집권 이후 발생한 초유의 반란 사태를 푸틴의 권력이 도전받은 ‘수치스러운 사건’에서 러시아가 단결해 내전의 위기를 극복한 ‘승리의 서사’로 바꾸기 위한 연출이라는 것이다.
NYT는 “크렘린의 이미지 (조작) 기구가 활동을 개시했다”면서 “실제로 벌어진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푸틴의 입맛에 맞게) 다시 쓰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푸틴 대통령은 앞서 보안군과 국가근위대 소속 군인 2500명을 향한 연설에서도 “여러분이 조국을 구했다”고 말했고, 지난 26일 대국민 연설에서도 “국민의 단합을 확인했으며, 군인들이 대단한 용기를 보여줬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무장 반란 세력으로부터 조국을 지켰고 국민이 단합했다’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사실 왜곡이다. 바그너 용병은 반란 사태 당시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바그너 그룹이 반란의 교두보로 삼았던 로스토프나도누 시민들은 용병들과 셀카를 찍는 등 반란 세력에 우호적이었다.
군 수뇌부가 반란을 막기는커녕 묵인했다는 의혹마저 제기된다. NYT는 이날 미 관리들을 인용해 러시아군 핵심 수뇌부인 세르게이 수로비킨 러시아군 통합부사령관이 바그너 그룹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무장 반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수로비킨은 프리고진이 가장 지지해온 인물로, 지난해 10월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에 임명된지 3개월만인 지난 1월 경질됐다. 이를 두고 당시 영향력을 키우고 있던 바그너 그룹을 견제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알렉세예프 중장도 반란 중단을 촉구하는 영상을 올린 지 몇 시간 뒤 프리고진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는 “군이 조국을 구했다”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을 부정하는 동시에 푸틴 정권을 떠받치는 엘리트들의 결속에 심각한 균열이 존재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가디언은 이번 반란 사태를 ‘승리’로 묘사하는 것은 베테랑 선동가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지적했다. 푸틴 대통령 자신이 ‘반역자’로 규정한 프리고진에 대한 기소를 철회하고 벨라루스로 떠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은 상식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크렘린궁은 여론 통제도 시작했다. 더타임스는 크렘린궁이 지난 26일 러시아 방송에 ‘쿠데타’와 ‘폭동’이라는 표현 대신 ‘반란 시도’를 사용하라는 지침을 내리고 반란 당시 전투로 인해 파괴된 흔적을 방송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바그너 그룹의 반란 과정에서 사망한 러시아군 조종사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지침도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소속 러시아연구원장 샘 그린은 트위터를 통해 “푸틴의 레토릭은 대중뿐만 아니라 엘리트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서 “푸틴은 ‘모두가 내 편이니 배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문제는 엘리트들이 그 말에 넘어가주느냐 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러시아는 러시아군의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듯 27일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 크라마토르스크 도심에 미사일 공격을 퍼부었다. 식당가와 쇼핑센터 등이 폭격을 받아 17세 소녀를 포함해 최소 4명이 숨졌고, 생후 8개월 아기와 외국인 등 최소 40명의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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