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기만에 사로잡힌 그들…신간 '부역자'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둥전(東珍)은 청나라 숙친왕의 열네 번째 딸이었다. 그는 방 수만 200개인 베이징 저택에 살았다. 방은 프랑스식으로 벽과 천장이 도금돼 있었고, 루이 15세 양식의 가구가 가득했다. 폭포가 딸린 정원도 여러 개였다. 그러나 둥전이 네살이 될 무렵, 청이 멸망하면서 가족은 만주 지역으로 쫓겨났다. 숙친왕은 청나라 수복을 위해 일본의 도움을 받고 싶어 했다. 그는 대륙을 떠돌던 낭인(浪人·주군 없는 사무라이)이자 대동아 공영권을 꿈꿨던 모험가인 가와시마 나니와를 만나 의기투합했다. 숙친왕은 우정의 증표로 딸 둥전을 나니와의 양녀로 입양 보냈다. 그러나 둘의 우정이 깊진 않았다. 서로의 노림수가 다른 '계산'에 기반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가와시마 요시코로 이름이 바뀐 둥전은 음모와 배신이 자욱한 환경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없는 세계를 애타게 동경하며 자랐다.
네덜란드 출신 언론인이자 학자인 이안 부루마가 쓴 '부역자: 전쟁, 기만, 생존'(글항아리)은 제목대로 부역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일제에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중국 정부가 지목한 요시코를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부역한 독일계 핀란드인 펠릭스 케르스텐과 동유럽 출신으로 네덜란드에서 주로 활동한 유대인 프리드리히 바인레프의 삶을 조명했다.
이들 중 천수를 누리지 못한 이는 유일한 여성인 요시코다. 그는 어린 시절 나니와의 양녀로 들어간 후 새아버지에게 성적으로 착취를 당했다. 몽골인 간주르잡과의 정략결혼도 행복하지 않았다. 이혼 후 상하이로 가 일본 육군 장군 다나카의 정부 역할을 하며 스파이로 활동했다. 그는 많은 남성과 여성 모두와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상하이의 마타하리'로 불린 그는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며 남성 편력과 여성 편력을 이어갔다. 그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숭배받는 '남장미인'이기도 했다. '마지막 황제' 푸이를 도와 만주국을 세우는 데도 일조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청나라를 되찾자는 꿈같은 영웅의 느낌 때문에 여자의 삶을 포기하고 남자가 되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삶의 화양연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일본이 중국에서 물러가자 그는 국민당 정부에 체포됐다. 중국의 일본침략을 도운 죄, 나라를 팔아넘긴 죄, 청나라를 수복하려 한 죄, 일본의 선전 내용을 퍼뜨린 죄,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들과 수없이 잠자리를 한 죄 등으로 기소돼 사형 판결을 받았다. 중국과 일본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상하이의 마타하리'는 그렇게 허무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후덕한 외모의 케르스텐은 볼품없는 인물이었다. 똑똑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용기가 있지도 않았다. 대신 타고난 손힘이 있었다.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식당에서 설거지하며 근근이 생활하다 우연히 중국인 B.코 박사를 만나 티베트와 중국의 신비한 치료법과 마사지 기술을 사사했다. 이후 그가 마사지하면 못 고치는 병이 없었다. 마사지 받는 이들은 심신이 편안해진다며 그를 다시 찾았다. '마법의 손을 가진 남자'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유럽의 귀족들과 고관들을 주무르며 큰돈을 벌었다. 그중에는 나치친위대(SS)의 수장이자 유대인 학살 최고 책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도 있었다. 그는 힘러의 개인 마사지사로서 그의 심신을 돌보며 나치에 부역했다. 그런데도 그는 힘러와의 특수관계를 이용해 수백만 명의 무고한 유대인 생명을 구하는 등 나치에 용감히 저항했다며 본인을 미화해 전후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유럽을 전전한 바인레프는 대놓고 부역했다. 유대인인 그는 돈을 받고 유대인들을 나치에 팔았다. 그는 간혹 나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지만, 그리고 때로 선한 일도 했지만, 긴 여생을 들춰보면 그의 일생은 사기꾼의 삶에 가까웠다. 그는 돈만 호주머니에 챙긴 뒤 그들 중 일부를 독일 경찰에 넘기기도 했다. 많은 유대인이 그를 '게슈타포에 부역했던 인정사정없는 사기꾼'이라고 여겼다. 그의 사기행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터키 등을 돌아다니며 1988년까지 교수이자 영적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저자는 이들 셋 다 복잡한 성장배경이 있었고, 민족과 성(性) 문화에 있어 다양한 정체성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모두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다 가지고 있었으며 그 행위가 선한지 악한지는 많은 경우 환경에 좌우됐다고 부연한다. 그러나 공히 자기기만의 '지옥'에 빠져 자신의 인생을 '허구'로 만들어버리는 우를 범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책 속 부역자들의 문제는 이들의 기만이, 때로 아마도 거짓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기만이, 결국 자기기만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거짓 속에서 살다 보면 흔히 그런 결과를 맞는다. 두려움이나 기회주의에 사로잡혀 거짓 속에 사는 사람들은 결국 거짓에 사로잡혀 버린다. 이들이 단테가 말한 여덟 번째 지옥(사기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가는 지옥)에 간 이유는 타인을 속였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이 지옥에서 고통받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스스로를 속였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인생을 허구로 만들어버리면 아무런 정체성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박경환·윤영수 옮김. 4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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