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여성’이 매년 미국인 이웃들을 위해 파티를 연 이유[플랫]

플랫팀 기자 2023. 6. 28.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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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주해연 옮김| 글항아리 | 463쪽 | 2만2000원

어머니는 ‘블랙베리 여사’였다. 여름이면 동네 어귀 숲에서 블랙베리를 따 팔았다. 숲속 곰이나 총을 든 백인 남성에 주눅 들지 않았다. 38구경 총을 가지고 다녔다. “엄마의 블랙베리 수확은 채집의 스릴감과 주변 사람 모두를 먹일 수 있다는 만족감에서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또 ‘버섯 여사’였다. 가을이면 버섯을 따러 다녔다. 균류학을 공부하려 <버섯 사냥꾼을 위한 휴대용 도감>을 반복해 읽었다. 그 버섯을 유통업체에 팔았다.

미국 작은 백인 마을의 한국인 블랙베리 여사

어머니는 미국 워싱턴주 작은 마을 셔헤일리스에서 유명 인사였다. ‘블랙베리 여사’로 불리기 전부터 그랬다. 길가나 너른 들판, 기차 철로를 따라 민들레잎을 땄다. 달래나 우엉도 채집했다. 지붕에 고사리를 말렸다. 동네 아이가 물었다. “네 엄마는 왜 맨날 지붕 위를 걸어 다녀?” 고사리를 넣은 비빔밥을 식탁에 내놓곤 했다. 바닷가로 원정 가 해초를 거둬오기도 했다. 엄마는 김치를 담그러 ‘나퍼 캐비지’라고 부르는 ‘진짜’ 배추를 찾으러 다녔다.

어머니는 미국인 이웃과 자녀 학교 선생들을 위해 매년 파티를 열었다. 미국 음식 요리법을 열심히 공부해 음식을 내놓았다. 남편 식구들에게 정통 미국식 추수감사절 잔치까지 열었다.

백인 동네였다. 어머니는 한국에서 상선 선원인 백인 남성과 결혼했다. 1972년 여름 부산에서 자녀들을 데리고 셔헤일리스로 이주했다. 이 동네 최초의 아시아인이자, 수십년 만에 나타난 이민자들이었다.

<전쟁 같은 맛>의 그레이스 M 조는 미군기지 클럽에서 일했던 어머니의 삶을 돌아본다. 사진은 경기도 송탄의 기지촌. 글항아리 제공

어머니는 미국인과 결혼한 여성, 입양인 등 셔헤일리스로 온 한국인들에게도 음식을 대접했다. 경남 창녕이 고향인 어머니는 김치 한 통을 손에 들고 ‘모국어’로 말했다. “함 묵자.” 특히 입양아들을 챙겼다. “엄마는 이 아이들에게 김치만큼은 떨어지지 않게 하겠노라 작심했다. 엄마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당신이 먹여야 할 입이라는 걸 알아보았고, 잠시나마 그 애들이 잃어버린 한국 엄마가 되어주었다.”

미국인은 파티, 입양인은 김치…음식에 깃든 의미들

어머니 이름은 ‘군자’(1941~2008)다. 딸이자 저자 그레이스 M 조는 요리사이자, 파티 호스트, 프로 채집인, 한국인 후원자였던 어머니 모습 뒤에 드리워진 어둠, 생존 의지와 도전, 음식에 깃든 의미를 대학에 들어간 뒤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군자의 음식 대접은 “보살핌의 몸짓인 동시에 저항의 행동”이었다. “백인 노동계층 중심 공동체에는 집단적 무의식 속에 타자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스며 있었는데, 엄만 먹을 것을 이용해 이를 깨트리려 했다.” 추수감사절 잔치도 자신을 경계하는 남편 식구들의 두려움을 깨려 연 것이다.

<전쟁 같은 맛> 저자 그레이스 M 조가 유년기를 보낸 미국 워싱턴주 셔헤일리스 집. 조의 어머니 군자는 이곳 숲에서 고사리 같은 나물이나 블랙베리를 채집했다. 글항아리 제공

군자가 한국인 아내와 입양인을 보살핀 건 “(어머니가) 매일같이 먹고 요리하는 일이, 우리가 남겨두고 떠나온 사람들과 장소에 우리를 연결해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는 또 “섬세한 방법으로 미국 가정과 미국이라는 국가가 우리의 구세주이고 우리가 이들에게 빚을 졌다는 담론에 구멍”을 내는 행위였다.

어머니 소원대로 학자(뉴욕 시립 스태튼아일랜드대학 사회학·인류학 교수)가 된 조는 어머니 생애를 개인적, 학문적 인생의 중대 지표로 삼고 좇아간다. 인종과 젠더, 전쟁과 디아스포라 문제가 어머니 삶 층층이 겹친 걸 확인한다. 조는 여성, 피식민자, 억압받는 자라는 새로운 시선으로 군자가 직면한 부정의를 들여다본다.

군자는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한국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와 오빠가 한국전쟁 때 죽었다.

미국인인 아버지와 동침했다는 죄로 추방당한 어머니

“미국인인 아버지와 동침했다는 죄로 추방당했다.” 조는 “인종화된 우리 몸 때문에 당신의 과거를 감출 수 없게 되었고, 이는 주변부에서 살아가야 함을 의미했다”고 말한다. 외국인과 관계를 가져 “자녀를 둔 많은 여성이 ‘사회적 문제’로 여겨지는 집단을 퇴출한다는 전후 한국의 국가적 의제를 떠맡은 사회복지사들의 압력에 못 이겨 자녀를 국제 입양 보냈다는 사실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승만이 “양부인과 혼혈 아동”의 존재를 “사회적 위기”라고 공개 비난했다. “미군 아기 문제”의 해결책으로 초국적 입양 대상자로 만드는 대통령령을 선포했다

조가 태어난 1970년대 아이 부모 중 한 명이 외국인이면, 한국 국적자에서 배제했다. 아이는 공립학교에 다닐 수도 없었다. 사회적 낙인까지 찍었다. 미국에 와서도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흑인이랑 데이트할까 봐 걱정한 아버지

조는 어린 시절 동네 아이에게서 “개 잡아먹는 주제에!” 같은 소리를 듣곤 했다. ‘칭크’(중국인을 낮잡아 이르는 인종차별적 멸칭)나 ‘잽’(일본인에 대한 멸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커가며 복합적인 인종주의와 차별을 경험한다. 아버지는 어머니한테는 ‘구두쇠’ ‘짠돌이’였지만, 번 돈의 대부분을 교육에 쓸 정도로 자녀에게 헌신했다. 조가 고등학교 때 프랑스 어학연수도 두 차례 보냈다. 인종 문제에선 다른 아버지였다. 일상에서 ‘니거’라든가 ‘몽골로이드’ 같은 말을 썼다. 조가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흑인 남자랑 데이트할까 걱정했다.

“아빠 딸이 아시아인이잖아요!”라는 말에 “넌 흑인 아니잖아”라고 대꾸했다. 다시 조가 말했다. “난 백인도 아니라고!”

아버지는 딸에게 “독립한 다음에 아프리카랑 인도 어떻게 됐는지 봐라!”고도 했다.

조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가 속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아버지를 들여다본다. 1919년생인 아버지가 성장하던 시기 황인종은 백인종 밑이지만, 흑인종보다는 위라는 식의 인간 종을 구분하는 식민주의적 위계가 인종에 대한 서구인들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생각한다. “아버지는 아시아인이 근면 성실한 모범적 소수자라서, 당신 같은 사람들이 조금만 도와주면 백인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믿음을 내면화했는지도 모른다.”

창녀요, 배신자 취급 당한 ‘양공주’와 ‘양공주 자식’

조는 어머니가 추방당한 또 다른 이유도 확인한다. 조는 1994년 올케에게서 “그레이스, 어머님이 매춘을 하셨었어요”라는 말을 듣는다. 군자는 미 해군 기지촌 클럽에서 일했다. 아버지를 처음 만난 곳도 이곳이다. 조의 질문에 아버지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홀리며 “어쩌다 한 번씩이었어. 네 엄마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지. 내가 거기서 데리고 나왔고”고 말한다. 조가 따진다. “엄마를 데리고 나오기 전에 아빠도 엄마 고객 중 한 명이었던 거 아닌가? 손님이 없으면 거기서 일을 할 수가 없잖아요. 수요와 공급 말이에요.”

조는 성매매와 성노동에 관한 수많은 텍스트를 들여다보며 어머니에 드리운 그림자의 사회과학적 의미를 찾아내려 한다. 조는 “임신과 출산으로 성적 일탈의 물적 증거를 지니게 된 여성들”이 사회 주변부로 밀려난 일들을 떠올린다. 군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혼모보다 한국 사회가 더 경멸하는 여성은 ‘외국인과 살을 섞은’ 여성이었다. 이들은 창녀요, 배신자였다.”

1971년 용산 미8군 기지촌에 있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이 간호사와 함께 보건 검사를 받으러 가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도 뉴욕 한인 마트에서 어눌한 한국어로 고등어 ‘세 개’를 달라고 했다가 노기와 혐오를 띤 반응을 받은 경험을 떠올린다. “주근깨 있는 내 피부와 백인 같은 생김새를 보고 ‘양공주 자식’임을 알아차렸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 엄마 세대인 그 중년 남자 연배의 한국인들은 한국 여자와 미국 남자 사이에 태어난 이중 인종 아이들을 그렇게 부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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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대상으로 자행된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폭력

조는 “한국전쟁, 미국 군사주의와 한국 독재 정권하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 성인 여성과 소녀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노골적이거나 모호한 형태의 조직적 폭력”에 관한 글을 써왔다. 그는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좇은 것이 아니라 엄마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아야 했기에 이 작업에 착수했다”고 말한다.

조는 그 시기 기지촌에 관한 여러 미시사를 불러낸다. 당국이 기지촌 성산업을 ‘외화벌이’의 목적으로 홍보하고,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권리를 박탈당한 사실도 지적한다. “아버지들은 딸이 일해서 번 돈으로 가계 빚을 갚았으면서도 그 딸을 호적에서 파냈다. 일부 여성은 학대자 손에 목숨까지 잃었지만, 이 남성들은 제대로 재판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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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성별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창녀’나 ‘걸레’ 같은 욕을 툭하면 무심코 사용하는 방식을, 이러한 모욕이 대중문화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도 연결해 생각한다. “엄마가 느낀 자기 가치에 대한 감각은 그런 낙인과 얼마만큼 연관되어 있을까? 도를 넘은 수치심이 엄마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군자는 ‘조현병’을 앓았다. 조가 어머니의 증세를 알아차린 건 고등학교 시절인 1986년이다. 군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미행하고, 로널드 레이건이 집 전화를 도청한다고 생각했다.

군자는 구급차 소리를 들으면 조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공습 사이렌 같은데.” 매일 같은 시간 듣는다고 했다. 전쟁에 대한 기억 때문인 듯했다. 군자는 또 조 생일인 ‘1월7일’을 마치 경매인이 그러듯 빠른 속도로 1분이 넘도록 계속 반복해 읊조리기도 했다. “일월칠일일월칠일일월칠일일월칠일…”

기지촌 여성에 대한 연대의 목소리였을까

1월7일은 뉴욕타임스가 2009년 ‘수십년간의 침묵을 깨고 미국인을 위한 성매매 업소를 조성하는 데 한국 정부가 한 역할을 밝힌 전직 성매매 여성’에 관한 기사를 실은 날이다. 조는 “어쩌면 엄마는 미래를 엿보고 기지촌 여성 원고들에 연대하는 목소리를 낸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조는 어머니 개인 정신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을 살핀다. ‘유년기 사회적 역경’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 ‘신체적 외상 혹은 성적 트라우마’에 함께 ‘이민 경험’과 ‘백인 동네 거주’도 발병에 작용한 것으로 봤다. 조는 ‘비백인’의 조현병 발병률이 그 해당 비백인 인구 비율 감소에 따라 증가한 통계 등을 확인한다.

셔헤일리스는 유권자의 65%가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곳이다. 이웃 도시 센트레일리아는 2016년 인구당 KKK 단원이 가장 많은 곳 상위 10위에 들었다.

군자는 셔헤일리스 소년원에서 11년간 오후 11시부터 오전 7시까지 전일제 야간 근무 일을 했다. 군자가 거슬려 한 이들은 소년원에서 일하는 극우반공단체인 ‘존 버치 협회’ 회원들이었다. 버치 추종자들은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에서 “너는 북한에서 왔어, 남한에서 왔어?”로 바꿔 물었다. 조는 질문에 숨겨진 의도가 있다고 본다. “너희 빨갱이들. 처신 똑바로 해!”

이 소년원에서 미성년자 폭행과 학대, 성폭력 등이 조직적으로 벌어진 사실이 훗날 밝혀진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가난과 폭력, 권력

조는 “조현병은 가난과 폭력이, 권력의 눈 밖에 나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T M 루어먼의 말도 인용한다. 조는 “엄마의 항변에는 단지 정신 나간 사람이 늘어놓는 말이 아니라 실재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여성이 진실을 말했을 때 광기라고 이름 붙여져 침묵당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라고 말한다.

책의 한 축은 음식 이야기다. 군자는 분유를 진절머리 낼 정도로 싫어했다. “전쟁 같은 맛이야.” 미국 식량원조 때 분유만 먹은 기억 때문인 듯했다.

조는 대학원에 다닐 때 군자에게서 한국 요리를 배웠다. “엄마를 방문하는 일은 마치 1950, 1960년대 한국과 조우하는 요리 역사 수업 같았다. 엄마 인생 막바지에 우리가 함께 먹었던 음식은 분명 하나같이 당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었으리라.” 군자가 좋아한 유일한 미국 음식은 기지촌에서 일할 때 맛본 치즈버거다. 아버지와 데이트하러 간 기지촌 가장 좋은 레스토랑에서 어머니가 주문한 게 치즈버거였다.

<전쟁 같은 맛> 저자 그레이스 M 조. 글항아리 제공

미군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을 찾는 일이 흔하던 시절 치즈버거는 “생존과 종속의 복합적 상징물이었고, 한국인들이 굶주리는 와중에 미국인들은 남겨서 버릴 수도 있는 사치품”이었다. “엄마에게 치즈버거는 미국이 줄 수 있는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상징하기도 했다. 미국의 제국주의는 엄마의 무의식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고, 음식에 대한 갈망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군자에겐 “병증인 동시에 치료법”인 음식이었다.

병증이자 치료법인 치즈버거, 생존 의지 담은 김치

조는 유아용 식탁 의자 곁에서 김치를 조각 내주던 군자를 떠올린다. “오, 김치 잘 먹네! 착한 내 딸!” 조가 음식을 먹는 최초의 기억이자, 군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나는 엄마와 함께 있기 위해 다시 눈을 감았다. ‘자, 김치 더 무라. 그레이스야, 우린 생존자야. 너는 무엇이든 견딜 수 있어.’”

책은 “타락한 여자”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명예로운 삶을 살았고, “정신병자”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이었던 어머니를 애도하며 쓴 회고록이다. 연구와 공부의 기록이기도 하다. 조는 “미군 성노동자로서 엄마의 과거를 연구하겠다는 확고한 뜻을 가지고 뉴욕시립대학 사회학 박사과정에 등록했다”고 말한다. 박사 논문은 “흔히 ‘Yankee whore(양갈보)’라고 번역되는 표상을 한인 디아스포라에 출몰하는 유령으로 분석하고자 한다”로 시작한다. 그는 이 논문을 쓸 때 어머니 허락을 받았다. 사망 뒤 나온 책 출간을 두고 “나는 어머니가 책 출간을 바라는 것이 오랫동안 짓눌려온 무거운 수치의 장막을 걷어내어 스스로 침묵을 깨고 싶다는 당신의 바람이라고 여겼다”고 했다.

책은 2022년 아시아·태평양 미국인 도서상을 받았다. 2021년 전미도서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작에 올랐다.

▼ 김종목 기자 jomo@khan.kr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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