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암 판정을 받았다면, 사실대로 알려야 할까?

한겨레 2023. 6. 2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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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김준혁의 의학과 서사(74)
‘페어웰’을 통해 세계관과 질병의 관계 이해하기
룰루 왕 감독의 2021년 영화 <페어웰>의 한 장면. 영화 스틸컷

현대 사회는 여러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사회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나 자신만 돌아보아도 여러 세계관이 혼재되어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어딘가에선 한국 전통의 세계관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가도, 다른 곳에선 완전히 서구적인 생각과 관점으로 살아간다.

건강과 질병의 문제를 따지는 것에서 세계관이 그렇게 중요할까 싶으실지도 모르겠다. 질병이란 어차피 신체에 나타나는 생물학적 변화이고 문제인데,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투병 과정이나 치료에 큰 영향을 미치겠느냐고 생각하실 수 있다. 물론 우리에겐 한의학과 현대 의학이라는 (이렇게 표현한다고 해서 한의학이 현대적이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절대 아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건강과 질병을 바라보는 체계가 있기에,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 질병 이해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쉬운 편이긴 하다. 일단 두 체계만 해도 세계관의 차이로 인해 진단이나 치료가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다른 두 의학 체계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질병과 관련한 태도나 접근에서 상이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예를 들면, 질병에 대한 사실을 환자에게 바로 알려주는 일은 좋은 걸까? 다분히 서구적인 관점에선 환자에게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해야 하고 환자가 모든 일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동양 전통의 관점에선 특히 중한 병인 경우 환자가 꼭 알 필요는 없고, 결정도 가족이 같이 내리거나 심지어 대신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의 차이나 충돌은 아직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사람은 마음이 약하니 진단명을 말해주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라는 가족의 요청을 여전히 우리는 병원에서 듣게 된다. 한편 진실 말하기, 즉 환자에게 있는 그대로를 말해야 한다는 것은 의료윤리나 의료커뮤니케이션 수업의 주제로 등장하곤 한다.

룰루 왕 감독의 2021년 영화 <페어웰>은 바로 이 차이를 화면에 끌어들인다. 영화는 여러 상을 받았고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가 다루고 있는 갈등일 것이다. 설명을 위해선, 영화의 전반을 스케치하고 시작하는 게 좋겠다.

말해야 할 이유와 말하지 말아야 할 이유

뉴욕에서 사는 빌리는 부모님 댁에 갔다가 할머니가 폐암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소식을 듣는다. 가족들은 빌리를 두고 중국으로 모이려고 계획 중이었는데, 그 이유는 빌리가 할머니를 만나면 사실을 털어놓아 문제를 더 크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척들은 할머니에게 말기 암 진단을 숨긴 채로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모이고 있었다. 그냥 다 모이면 의심을 살 것이 분명하기에, 이들은 이미 핑계도 준비한 상태다. 지금 일본에 사는 빌리의 사촌동생 결혼식을 위해 모이기로 한 것이다. 가짜 결혼식까지 준비해서.

잠깐 멈칫했던 빌리는 어찌 보면 당연히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간다. 할머니를 제외한 모두는 빌리의 등장에 긴장하고, 영화는 당장에라도 진실을 폭로할 것 같은 빌리와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고자 하는 친척들의 강 대 강 대치 국면으로 이어질 듯하다(실제로 대치하지는 않지만, 영화는 빌리와 다른 가족 사이의 긴장을 슬기롭게 표현하고 활용한다). 마음을 잡지 못하는 관객들이 빌리에 대해 양가감정을 품는 것과 함께. 아마 관객들도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빌리는 사실을 말해야 할까, 말하지 말아야 할까.

영화 중간, 가족이 함께 병원에 가는 장면에서 의사마저도 “중국에선 이런 상황에서 환자한테 이야기하지 않는다”며 본인 또한 자기 할머니에게 진단을 말씀드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말하는 것이 환자 본인에게 더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암에 걸렸을 때 죽게 하는 것은 암이 아니라 공포’라는 속담 같은 것이 영화 초반에 언급되기도 한다).

한편, 미국에서 살아온 빌리는 당연히 진단을 할머니에게 이야기해야 하고, 할머니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고 그에 따라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택은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으므로) 화해할 수 없는 생각이지만, 영화는 둘 중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 넓은 맥락에선 조금 더 앞선 시점에 개봉했던 영화 <미나리>처럼 이민자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로도 읽히는 이 영화는 중국인과 미국인의 정체성 중 어느 한쪽을 분명히 선택해야 한다거나, 한쪽만이 옳다고 말하려 하지 않는다.

두 선택은 다 충분한 이유가 있다. 게다가, 우리는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일관된 삶을 살지 않는다. 영화는 바로 앞의 말과 다르게 행동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다. 모든 일이 다 그럴진대, 중대한 사안이라고 하여 다를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을 위하여 영화의 결말은 남겨두려 한다. 영화에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 외에 새로운 것이 등장하진 않는다. 하지만 결말을 예측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빌리를 보고 할머니는 묻는다. “왜 그러니? 몸이 안 좋아?” 그것은 빌리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다른 가족들의 불안한 표정과 함께, 이런 역전의 상황들을 통해 영화는 관객에게 직접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 스틸컷

독립적인 세계와 관계적인 세계

다시 주제로 돌아오자. 질병에 대해 환자에게 ‘말해야 한다’ 대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의 충돌은 우리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전자는 독립성, 자율과 자존을 우선하는 서구 자유주의의 소산이다. 후자는 관계성, 온정적 정서와 돌봄을 우선하는 동양 가족주의의 유산이다. 우리는 독립이 당연한 세계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장 우리 마음속에 어느 쪽이 좋은 것이라고 쉽게 결정지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한 후자에 어느 정도 자신을 내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실은 이게 꼭 서양과 동양의 차이라고 구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 서양이라고 무조건 개인의 결정만을 우선하는 것도 아니고, 동양이라고 무조건 거짓말을 하고 감추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충돌이 벌어지는 (즉, 독립이 더 먼저인지, 관계가 더 먼저인지 고민하게 되는) 영역은 삶의 다른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질병이 지닌 특수성은 이 선택을 큰 고민으로 만든다.

정의상 질병은 그것을 가지게 된 사람(환자)을 취약한 상황에 빠뜨린다. 그것은 꼭 신체적 측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몸이 아프지 않더라도 병으로 인해 정신적으로나 사회적 어려움을 겪는 일은 흔히 나타난다. 우리는 취약한 사람을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돌봄에는 그 사람이 더 큰 어려움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포함된다. 적어도 중병은, 그 대상자에게 엄청난 낙담을 안기는 사실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환자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남은 날이 얼마나 될지 알기 어렵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지 못해서 꼭 해야 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한스러울까.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나 끝마치지 못한 일을 두고 세상을 떠나는 이를 두고 우리는 황급한 죽음이라고, 어수선하며 급한 일이라고 평가한다. 죽음이 그런 일이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임이 틀림없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선 남은 날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유는 충분히 들었다. 자, 당신의 선택은?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말하느냐다. 영화 스틸컷

‘어떻게 말할 것이냐’가 더 중요

상당히 모호한 답을 내고 끝나는 영화와 달리, 나는 환자에게 사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을 말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에 있다고 믿는다. 사실을 아는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면, 오랜 정성과 시간을 들여 에둘러 말하는 방식을 택할 것이고, 바로 사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담백하게 사실을 전할 것이다.

우리는, 특히 과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전달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이며 보편과 객관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런 믿음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은 사실이되,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으며, 맥락에 맞지 않는 사실 전달은 오히려 큰 충격과 분노, 공포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사실 말하기’는 온당하지 않다. 사실을 말하되, 잘 말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독립과 돌봄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무관한 삶,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삶은 그저 착각이고 주변의 보살핌이 있기 때문에 독립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 세계 속에선, 이 글이 고민하고 <페어웰>이 담았던 사실을 말할지 여부의 고민은 필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 생각하는 세계라면, 어떤 결론을 내렸어도 괜찮을 것이기에.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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