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멘탈’ 이채연 애니메이터 “픽사는 자유롭지만 큰 책임 따르는 곳”
마블과 소니를 거쳐 디즈니·픽사 스튜디오까지 섭렵한 한국인 애니메이터 이채연. 그에게 픽사에서 일하는 경험은 어떤지 물었다.
6월 개봉한 '엘리멘탈’에 이르러, 원소들이 살아 움직이고 서로 교감을 나누기 시작했다. 영화의 배경 엘리멘트 시티에서 다수는 '물’의 민족이다. 원소 속성상 물과 공기, 흙의 상생은 어렵지 않게 이뤄진다. 여기에 '불’이 합류한다면 어떨까. 새 터전에 둥지를 튼 불 속성의 '버니’와 '킨더’는 아이를 낳고 가게를 꾸리며 단란한 가정을 이룬다. 엘리멘트 시티는 불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도시다. 버니와 킨더 사이에서 태어난 '앰버’ 역시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장해간다. 그런데 하필 앰버는 자신과 출신이 전혀 다른 물의 민족의 '웨이드’와 사랑에 빠진다.
러브 스토리의 탈을 쓴 '엘리멘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채로운 맥락을 읽을 수 있다. 인종과 다문화에 관한 사회적 함의뿐 아니라 세대 갈등과 화합의 테마까지 깃들어 있다. 이는 피터 손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비롯됐다. 뉴욕에서 나고 자란 한인 2세 피터 손은 두 세대에 걸쳐 경험한 이민자의 이야기를 '엘리멘탈’ 구석구석에 심어놓았다. 앰버의 부모가 식료품점을 운영한다는 설정이나, 소수인 불 원소가 모여 사는 구역이 따로 있다는 점 등은 미국에 이민 온 다양한 민족을 연상케 한다. 감독 외에도 레이아웃 아티스트, 테크 리드 등 다수의 한국계 크리에이터가 '엘리멘탈’ 작업에 참여했다.
이채연 애니메이터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마블 스튜디오, 소니 픽처스에 이어 디즈니·픽사 스튜디오까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를 거쳤다. 타오르는 불과 흐르는 물에 어떻게 감정을 불어넣을 것인가. 불규칙한 형태와 유동적인 움직임을 가진 원소의 특징은 그야말로 애니메이터를 유혹하기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는 소재일 터. 5월 30일 피터 손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이채연 애니메이터를 만났다.
‘엘리멘탈’로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이민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이니만큼 제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에요. 한국계 감독인 피터 손과 함께 한국에 와 있다는 사실도 무척 설레고 영광스럽죠. 무엇보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어요. 숙소 근처에 유명한 커피숍이 있다고 해서 들렀는데 대기 인원이 192명이라고 해서 충격을 받기도 했죠. 다음에 오게 되면 꼭 다시 가보려고요(웃음).
어떤 캐릭터에 공을 들이셨나요.
저도 같은 이민자로서 앰버(불)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양한 인종과 문화권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사는 방식에 대해 고민했던 경험을 '엘리멘탈’에 담으려고 노력했죠. 제 경험을 되새기는 작업을 하면서 새롭게 깨닫는 것들이 정말 많았어요.
애니메이터로서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들었나요.
아무래도 원소 캐릭터의 물성에 설득력을 갖춰야 하는 부분이죠. 의인화를 한다고 해서 사람에 불이 붙은 형태처럼 보여서는 안 됐고, 불의 일렁임도 매력적으로 보여야 했기 때문에 애니메이터와 열심히 연구했어요. 웨이드(물)의 움직임은 너무 젤리나 물 풍선처럼 보이지 않도록 해야 했고, 공기도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줘야 했으니까요. 특정한 느낌에 치우치지 않게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가장 힘들었어요.
물과 불이 살아 움직이기까지
일정한 모양을 갖고 있지 않은 물과 불이라 굉장히 그리기 까다로웠죠. 게다가 의인화된 원소들의 감정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할 것인가가 무엇보다 관건이었어요. 가령 웨이드(물)의 팔이 앰버(불)와 접촉하면 어떻게 되는지, 앰버의 화난 감정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이죠. 불을 만난 물은 끓어오르기 시작할 것이고, 불에게도 화가 있다면 화염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가 하면 다양한 불의 형태 중에서 어떤 걸 택할지도 생각했습니다. 만약 언제든지 불면 사라질 촛불처럼 단정하게 흔들리는 느낌이었다면 앰버는 어딘가 연약하고 취약한 모습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고민이 많았겠네요.
원소 캐릭터를 통해 최대한 관객들이 인간적인 공감을 할 수 있게끔 하는 효과를 최우선으로 고민했어요. 결정된 효과들은 다음의 스토리텔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사람의 표정이나 행동에서 감정이 드러나듯 앰버나 웨이드의 내적 갈등을 겉으로 보여주기 위해 계속 아이디어를 냈어요.
의상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었나요.
불이 입어야 하는 의상이기 때문에 녹지 않거나, 녹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소재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인 동료인 캐릭터 디자이너가 체인으로 이루어진 드레스, 방화 기능을 갖춘 옷감을 제안했죠. 그 밖에 불에 강한 원석을 드레스에 추가하면서 보다 트래디셔널한 설정을 더했어요.
레퍼런스를 찾기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 대신 실사 레퍼런스를 많이 참고했어요. 가스레인지를 켰을 때 불이 붙는 모습을 슬로모션으로 촬영한 뒤 프레임 단위로 쪼개보기도 했고요.
픽사에서도 새로운 시도였겠네요.
원소의 원초적인 형상을 담고 있으면서도 적당히 사람의 모습을 갖춘,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최적의 밸런스를 찾아가는 작업이었어요. 물이 형상화된 웨이드는 컨트롤러(CG 작업에서 개체의 테두리에 찍힌 점으로, 이 점을 프레임마다 컨트롤해 개체의 움직임을 만든다)가 1만 개 정도였어요. 수많은 컨트롤러를 통해서 꿀렁꿀렁하는 움직임, 그러니까 무규칙하게 움직이는 형태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굉장히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죠. 너무 젤리처럼 보여서도, 너무 탱탱볼처럼 보여서도 안 됐어요. 정말 한 끗 차이로 느낌이 달라지니까요. 감독과 애니메이터가 많은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완성한 결과예요.
긴 제작 기간이 예상됩니다.
처음 피터 손 감독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지는 7년 정도 됐어요. 그때는 지금과 같은 기술력이 없었기 때문에 진척이 더뎠죠. 개발 단계인 프리 프로덕션이 끝날 때까지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가 걸렸어요. 마지막 8개월 동안 70~80명의 애니메이터가 투입돼서 애니메이션 작업을 진행했죠. 프리 프로덕션에서 소수의 인원이 기획한 스타일을 우리가 빠르게 캐치해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했어요.
픽사에서 벌써 두 작품(‘버즈 라이트이어’ '엘리멘탈’)을 하셨습니다. 기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성장한 기분이 들 것 같은데요.
‘버즈 라이트이어’는 굉장히 사실적인 스타일이었고, '엘리멘탈’은 정반대로 만화적이죠. 특히 '엘리멘탈’은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특이한 스타일을 갖고 있어요.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넘어갈 때 스타일의 간극이 큰 경우는 드문데, 재빠르게 새로운 스타일을 습득해서 표현해야 했기 때문에 굉장한 성장의 시간이 됐어요.
영화 애니메이터의 꿈
한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이후 게임 회사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했는데, 디즈니와 픽사 영화를 보면서 유학을 결심하게 됐어요. 캐나다에서 10년 정도 애니메이터 경력을 쌓다가 운 좋게 픽사와 일하게 됐죠.
특히 픽사의 어떤 작품들이 영향을 줬나요.
거의 모든 작품이 특별해요. 특히 '업’에 나오는 풍선에 매달린 집 이미지는 너무나 아이코닉(iconic)하잖아요. 누구나 '업’을 떠올리면 이 이미지를 연상할 정도로요. 상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싶은 자극을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또 하나를 꼽으라면 '인사이드 아웃’이에요. 추상적으로 상상만 할 수밖에 없었던 감정들을 시각화했을 뿐만 아니라, 재치 있게 표현한 점이 인상 깊었죠. 평소 사람의 심리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는 감정 캐릭터는 굉장히 쉬운 방식으로 표현돼 있지만 사실은 정말 묵직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감독이 된다면 이런 종류의 표현이나 감동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원하게 됐어요.
연출 계획도 갖고 계신가요.
최종적으로는 감독이 되는 목표를 그리고 있어요. 언젠가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아무래도 해외 생활하면서 느끼게 된 감정에 관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자아가 변화하는 경험이나 고독에 관한 것들을 추상적으로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애니메이터로서 '엘리멘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뭔가요.
앰버와 웨이드가 다투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체이싱하는 장면이 있어요. 부모님의 가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무게에 억눌리던 앰버가 난생처음 타인에게 다른 재능을 인정받고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이기도 해요. 그 혼란을 짊어지고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는 장면까지 감정의 빌드업이 시각적으로도 잘 표현됐다고 생각해요. 시시각각 드러나는 앰버의 감정이 붉은색에서 보라색으로 일렁이는 불로 표현된 효과도 잘 구현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가장 뿌듯함이 큰 장면이라고 할 수 있죠.
"다양한 문화가 좋은 작품 만든다"
게임 애니메이터로 커리어를 시작했기 때문에 제 뿌리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캐릭터 애니메이션, 영화 애니메이션으로 이동하면서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한 거죠. 표현의 영역이 훨씬 넓어진 느낌이에요. 인간이 아닌 사물도 인간처럼 표현할 수 있고요. 어떻게 보면 배우가 하는 연기보다 더 폭넓게 표현해낼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바로 그 매력에 빠졌어요. 그러다 다시 게임 애니메이팅 작업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어요. 내가 생각한 뿌리로 되돌아간 거니 특별한 의미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었어요. 오히려 달리기, 액션 등 단순한 움직임만을 표현하는 작업이 지루하게 다가왔죠.
다른 스튜디오와 차별화된 픽사 스튜디오만의 강점이 있나요.
마블 스튜디오는 워낙 뚜렷한 비전을 가진 곳이고 분명한 요청에 따른 작업을 수행하는 쪽이었어요. 상대적으로 픽사는 자율적인 만큼 주인 의식을 갖고 임해야 해요. 자유가 있는 대신 무거운 책임감도 따르는 거죠. 각자 맡은 숏(shot)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지만 더 큰 성취감과 만족감도 따라와요.
한국 애니메이션계에서도 세계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다양한 사람의 생각과 문화가 모여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토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걸 가능케 할 비용도 따르겠지만, 더 많은 인재를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가 마련될 수 있느냐가 관건이지 않을까 해요. 좋은 문화에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믿어요.
애니메이터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영화도 많이 즐겼으면 좋겠어요. 뚜렷한 목표를 갖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목표를 향해 가는 와중에는 정말 많은 실패가 따라와요. 도전할 용기,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끈기 그리고 캐릭터에 대한 공감 능력 이 세 가지가 애니메이터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한국 관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피터 손 감독이 한국에 대해 느끼는 특별한 애착만큼이나 저에게도 의미가 큰 작품이에요. 10명 정도의 많은 한국인 애니메이터가 참여한 작품이기도 해요. 작품에 실린 한국적인 요소들을 재밌게 봐주셨으면 하고, 엔딩 크레디트에서 얼마나 많은 한국인 스태프가 참여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지 않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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