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구 9년 만에 연극 무대…“내 연기 스타일, 연극에서도 다시 가능한지 시험”
패전 모른채 지낸 두 군인 이야기
누르듯 말하는 손석구 특유의 발음
마이크 사용해 스크린서처럼 전달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4월 일본 오키나와의 작은 섬 이에지마에서 일본군 병사 두 명이 전투 끝에 거대한 가쥬마루 나무 위로 올라간다. 일왕은 1945년 8월15일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했지만 병사들은 패전 사실을 모른 채 1947년 3월까지 약 2년 동안 나무 위에서 살았다. 이 실화를 두고 일본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가 연극 <나무 위의 군대>를 구상했지만 2010년 사망했고, 호라이 류타가 완성해 2013년 초연을 올렸다.
배우 손석구가 9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하며 <나무 위의 군대>를 택했다. 손석구는 드라마 <D. P.> <나의 해방일지> <카지노>와 영화 <범죄도시2>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영화·드라마 연기와 연극 연기는 뭔가 다를까. 손석구는 지난 27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서울에서 기자들을 만나 “똑같아요”라고 대답했다. “다른 건 없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재밌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죠. <범죄도시2>와 <나무 위의 군대>가 뭐가 다르냐고 하면 ‘이건 영화고, 저건 연극이다’라고 첫번째로 생각하진 않거든요. 매체가 달라져서 연기가 달라져야 한다는 건 솔직히 많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손석구는 자신이 태어난 섬을 지키려고 참전한 ‘신병’을 연기한다. 국가를 위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참전한 ‘상관’ 역의 베테랑 배우 김용준·이도엽과 합을 맞춘다. 입속말처럼 낮게 웅얼대면서도 조곤조곤 누르듯이 말하는 손석구 특유의 발음은 스크린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얼굴과 목소리의 작은 떨림만으로 감정의 큰 파장을 전달하는 세밀한 연기가 새삼 놀라웠다. 약 300석 규모 소극장 연극이지만 마이크를 사용하는 점은 손석구의 연기에 유리하게 보인다.
손석구는 “제 연기 스타일이 연극으로 다시 왔을 때도 가능한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극을 위해 연기 스타일을 바꾼다면 제가 연기를 하는 목적 중의 하나를 배신하는 것이었어요. 제가 연극만 하려다 영화나 드라마로 옮겨간 이유가 ‘사랑을 속삭이라’면서 전혀 속삭여선 안 되는 가짜 연기(대사가 관객에게 들리도록 크게 목소리 내는 연기)를 시키는 것이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죠.”
배우 최희서는 손석구와 함께 9년 전인 2014년 각 100만원씩을 모아 서울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 연극 <사랑이 불탄다>를 올렸다. 이때 인연으로 최희서는 <나무 위의 군대>에서 ‘여자’ 역을 맡아 신비로운 분위기로 연극을 해설한다. 원작에서 ‘여자’는 일본 전통 의상인 유카타를 입지만 최희서는 특정한 시대나 국가가 떠오르지 않는 옷을 입는다. 원작에 담겼던 전체주의 사상 비판과 오키나와 차별의 역사도 희석된 느낌이다.
민새롬 연출은 “원작의 일본 토속성이 한국 관객과 문화적인 간극이 있다고 생각해 보편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배경 지식을 모르더라도 ‘매일 믿음의 전투를 치르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전쟁이 비극인 이유는 끔찍한 살육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뼛속까지 다른 믿음을 가졌는지 드러내기 때문이기도 하거든요.”
‘신병’과 ‘상관’은 나무 위에서 서로 의지하지만 답답함도 커져 살의까지 느낀다. 손석구는 “이 연극은 현 시대에 한국 관객이 볼 때도 ‘땅에 붙는 작품’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거 내 얘기다’ 하면서 보셨으면 했다”고 말했다. “제가 아빠랑 가졌던 관계가 그랬던 것 같아요. 이해가 안되지만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고 믿고 따르잖아요. 이런 경험을 직장이든 가정이든 학교든 다 경험할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노우에 히사시는 생전 자신의 책상에 이런 메모를 붙였다고 전해진다.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재밌게, 재밌는 것을 진지하게, 진지한 것을 유쾌하게, 그리고 유쾌한 것을 어디까지나 유쾌하게.” 히사시의 메모처럼 <나무 위의 군대>는 전쟁과 국가폭력에 희생된 개인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유쾌한 만담(漫談)처럼 풀어간다. 웃음 포인트가 많아 작품이 너무 가벼워지지 않을지 민 연출과 배우들이 고민할 정도였다고 한다.
세 배우가 나무 세트를 오르내리며 연기하는 미니멀한 연극이다. 화려한 볼거리 없이 대사 중심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관객의 집중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결말에선 패전을 알고 나무에서 내려가자는 ‘신병’과, 패전을 부정하며 나무 위에서 버티자는 ‘상관’이 충돌한다. 손석구가 가슴을 쥐어짜듯 꺼내는 대사에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통찰이 압축돼 담겼다. “지켜주고 있는 것이 무섭고, 무서우면서도 거기에 매달리고, 매달리면서도 미워하고, 미워하면서도 믿는다.”
LG아트센터서울 U+스테이지에서 8월12일까지 공연한다. 원래 8월5일이 폐막일이었지만 개막 전부터 전석 매진되면서 공연을 일주일 연장했다. 공연시간은 휴식 없이 110분. 일반석 7만7000원, 발코니석 6만6000원. 14세 이상 관람가.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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