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은 잠시 쉬고 가실게요…올여름 안방은 오싹한 ‘여성 스릴러’
귀신은 잠시만 안녕~. 올여름 공포는 여성 스릴러가 책임진다. 여성이 중심이 되어 미스터리한 사건을 끌고 가는 드라마가 잇따라 등장했다.
지난 19일 시작한 <마당이 있는 집>(ENA 월·화 밤 10시)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남편한테 괴롭힘을 당하는 두 여자, 문주란(김태희)과 추상은(임지연)의 이야기다. 드라마는 주란이 집 마당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는 데서 시작해 ‘누가 상은의 남편 김윤범(최재림)을 죽였나’로 나아간다. 23일에는 악귀에 씐 여자 구산영(김태리)을 내세운 오컬트 드라마 <악귀>(SBS 금·토 밤 10시)가 찾아왔다. 산영은 붉은 댕기를 만진 뒤 악귀와 한몸이 되고, 이를 민속학 교수 염해상(오정세)과 경찰 이홍새(홍경)가 돕는다. 지난달 31일 시작한 <행복배틀>(ENA 수·목 밤 9시)은 소셜미디어 과시 욕망이 바탕인 스릴러다. 아파트 내 유치원 학부모들이 소셜미디어에서 ‘행복 경쟁’을 벌이고, 그중 누군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스릴러 장르를 대중화시킨 1987년 영화 <위험한 정사>(파라마운트플러스)도 미국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되어 지난달 31일 국내에 공개됐다.
<엠> <거미> 등 공포 심리를 자극하는 드라마는 1990년대 중반 등장했다. 임신중지(<엠>), 독거미(<거미>)처럼 공포를 일으키는 특정한 원인이 있었던 과거와 달리, 요즘 스릴러 드라마는 평온해 보이는 일상에서 불안정한 현실을 직시하며 공포심을 자아낸다. <악귀>는 내면의 불안한 욕망이 악귀를 깨운다. 1·2회에서는 보이스피싱·아동학대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거나, 억울한 이들이 목숨을 끊는 현실이 분노로 표출됐다. 가난한 청년을 내세워 “저런 데(좋은 아파트) 살아도 힘든 일은 있겠지만, 행복하게 불행할 것 같다”며 현실을 일깨운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여성들은 억압받는 일상이 심리적 불안을 일으키고, 넷플릭스가 오는 30일 공개하는 오리지널 드라마 <셀러브리티>는 소셜미디어에서 유명해지기를 바라는 욕망이 살인 사건으로 이어진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여성 서사가 가족·멜로 중심에서 스릴러로 확장된 것은 여성의 일상이 여전히 불안정하고 위험하다는 방증이다. 현실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공포심이 반영되어 더욱 감정 이입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악귀>는 오컬트와 범죄물을 접목해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는 사건을 가져오는 등 사회극 요소가 더해졌다”고 평했다. <악귀>가 방영 2회 만에 시청률 10%(닐슨코리아 집계)를 기록하는 등 스릴러는 최근 나온 로맨틱 코미디에 견줘 반응이 좋다.
여성 역할의 변화도 주목된다. 과거 스릴러 드라마에서 여성은 주로 피해자였다면 요즘은 스스로 상황을 해결하는 주체적인 인물로 나온다. 2015년 범죄 드라마 <미세스캅>(SBS)을 여성 강력계 팀장이 이끌고, 2021년 <구경이>(JTBC)에서 여성이 ‘빌런’과 ‘해결사’ 역할을 모두 맡는 식의 변화가 스릴러 드라마까지 이어졌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피해자였던 주란과 상은은 서로 연대하며 점차 주체적 존재로 거듭난다. <위험한 정사>는 그 변화를 가장 잘 보여준다. 1987년 영화는 댄한테 집착하던 알렉스를 조강지처 베스가 응징하는 것으로 끝난다. 댄에게 집착하는 알렉스만 '나쁜 여자'로 취급하며, 불륜녀를 조강지처가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는 ‘여-여’ 관점에서 사건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이번 드라마에서는 댄한테도 불륜의 책임을 지워 결말을 바꾼다. 또 조강지처였던 베스는 성공한 사업가로 나오고, 댄의 불륜을 용서하지 않는다.
무서운 외모로 공포심을 조성하지 않고 심리적인 불안함을 표출하는 스릴러는 여자 배우들의 연기 의욕을 부추긴다. <귀공자>의 김선호, <악마들>의 장동윤 등 남자 배우들이 영화에서 광기 가득한 얼굴로 변신을 꾀한다면, 여자 배우들은 스릴러로 도약한다. 김태리와 김태희 모두 스릴러 드라마에 첫 도전했다. 김태리는 씩씩하고 활발한 평소 이미지를 가져가면서 악귀로 변하는 순간 섬뜩한 모습을 잘 표현해 스릴러에도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평가가 더해졌다. 큰 눈망울을 십분 활용해 주란의 불안한 내면을 드러낸 김태희는 “완벽한 삶 속에서 불안을 느끼는 인물이 매력적이어서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김남주도 5년 만에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내년 상반기 방영 예정인 범죄스릴러 <원더풀월드>(가제)를 선택했다.
그러나 <행복배틀>이나 <셀러브리티>에서처럼 ‘과시하는 욕망’은 여전히 여성의 전유물처럼 다뤄지는 등 드라마 설정의 한계는 여전하다. 관련 작품이 늘어나면서 이야기 전개를 위해 무리한 설정을 가져와 개연성이 약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석진 교수는 “<악귀> 등에서 설명적이거나 ‘사건을 위한 사건’을 만드는 등 납득되지 않는 장면은 아쉽다”며 “스릴러는 서서히 긴장감을 조성해야 해 촘촘한 전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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