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에 걸린 세종은 ‘대리청정’을 택했다[이기환의 Hi-story](89)

2023. 6. 28.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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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문종)는 반드시 나 같은 임금이 돼야 한다.’ 세자를 당신 같은 성군으로 키우려 했던 세종의 노심초사가 서려 있는 경복궁 전각이 있습니다. 오는 8월 31일 마무리를 목표로 복원공사 중인 ‘계조당’입니다. ‘계조(繼照)’라는 명칭은 ‘사방에 비치는 광명을 계승해 비춰준다(以繼明照于四方)’는 <주역> ‘이괘·삼전’의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따라서 ‘계조’는 왕위계승을 뜻합니다. ‘계조당’의 복원은 고종 연간에 재건(1886)하고, 5년 뒤 보수(1891)된 전각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오는 8월 31일 완공을 목표로 복원 중인 경복궁 계조당. 공사가 거의 마무리됐다. 성군의 정치를 이어가려던 세종의 심모원려가 담겨 있는 전각이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1891년 계조당을 보수하면서 고종(재위 1863~1907)이 했다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1443년 계조당을 세웠고, 세자(문종)가 대리청정했다. 세종 시대에 모든 제도와 문물, 법식을 다 갖췄고 가장 융성했다”(<고종실록> 1891년 2월 8일)고 했습니다.

고종은 “내가 세종의 업적을 계승한다고 할 수 없지만, 동궁(순종)은 나(고종)의 가르침을 준수해주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고종은 ‘세종처럼 나(고종)도 세자(순종)에게 대리청정시키겠다’는 뜻을 언급한 겁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막말입니까. 고종이 감히 ‘세종 코스프레’를 한 건가요. 하지만 이해는 갑니다.

성군의 정치를 펼쳐 보이고 싶은 마음이야 고종인들 없었겠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세자-임금 계조당이 처음 건립된 것은 1443년(세종 25) 5월 12일이었습니다.

<세종실록>은 “왕세자(문종)가 신하들의 조회를 받을 전각을 짓고, 이름을 계조당’이라 했다”고 했습니다.

즉 왕세자(문종)가 국왕(세종)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 ‘정당(正堂·집무실)’으로 건립된 겁니다. 좀 의아하죠.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고 하잖습니까. 게다가 성군의 정치를 펼치고 있던 세종이 왜 굳이 세자에게 그 막중한 국정을 맡겼을까요. 왕조시대엔 태자 혹은 세자를 두고 ‘국본(國本·나라의 근본)’이라 일컬었습니다.

보통 3세 때부터 시작되는 후계자의 양성교육은 ‘국본’을 튼튼히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세종은 그러나 어떠했습니까. 맏형(양녕대군·1394~1462)이 세자였고, 더구나 셋째 왕자였죠.

왕권하고는 거리가 멀었죠. 맏형이 폐위(1418년 6월 3일)되고 ‘졸지에’ 세자위를 물려받은 지 불과 두 달여 만에 왕위에 올랐습니다(8월 11일).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세종은 당신의 아들(세자)에게는 그런 전철을 밟게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준비된 후계자를 키우는 것, 그것이 바로 ‘대리청정’이었습니다.

도적이 들끓었던 세종 시대 1437년(세종 19) 세종이 대리청정의 의지를 공식 언급한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요.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지나는데 조금도 다스린 효과가 없구나. 해마다 수재를 만나 기근이 끊이지 않고, 도적 떼가 날로 창궐해… 이제 세자에게 정무를 맡기고….”(3월 27일)

<세종실록>은 “임금(세종)이 전 해(1436) 가을부터 대리청정의 뜻을 밝혔다가 반대에 부딪혀 결심을 접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20년간 다스린 효과가 없다”는 세종의 말씀은 지나친 겸손이 아닌가요.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세종의 시대는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지 않은 건국 초였습니다.

인심이 흉흉했고, 범죄가 들끓었습니다. 예컨대 1439년 12월 15일 세종은 “복역 중인 사형수가 190명에 달하니 감형 좀 하면 어떠하겠느냐”고 운을 뗐습니다. 세종은 “근래 기근이 겹쳐 도적이 흥행하고… 사형수가 예전의 배가 되니 부끄럽게 여긴다”고 반성했습니다. 이건 약과입니다. “(왕실재산을 관리하는) 내탕고의 황금 술잔과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의 은찬(銀瓚·제기)까지도 털렸다”는 기사(<세종실록> 1436년 윤6월 14일)도 등장합니다.

그랬으니 세종이 “별다른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대리청정을 모색했던 겁니다.

계조당의 설계 조감도. 세종은 세자(문종)의 대리청정을 명하면서 세자가 신하들의 조회를 받을 전각인 계조당을 세웠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주상은 몸이 뚱뚱하고 고기만 먹어서…” 건강악화도 세종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세종은 타고난 ‘공부벌레’이자 ‘일벌레’였습니다. 건강을 챙길 시간이 없었겠죠.

오죽하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재위 1400~1418)이 세종에게 “주상은 몸이 뚱뚱한데 때때로 나와 놀면서 살 좀 빼야 한다”(<세종실록> 1418년 10월 9일)고 권했을까요. 태종은 “주상(세종)이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한다”고 걱정하는 유언까지 남겼답니다(<세종실록> 1420년 8월 28일·1422년 11월 1일).

그러나 이때만 해도 “내가 본디 병이 없고 늙지도 어리지도 않았는데, 어찌 뒷날을 걱정하겠느냐”고 자신만만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젊은 날의 자신감이었습니다. 공부와 정사에 매달릴수록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결국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가까워지는 1436년 말과 1437년 초 사이에 대리청정을 공식 거론한 겁니다.

세종은 “나이 40을 넘겼지만 ‘예지(銳志)’가 흐려져 90세 늙은이나 다름없다”면서 “게다가 병까지 생겨서 정사를 보기가 견디기 어렵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종은 “세자의 나이가 스무 살을 넘겼고 학문도 깊고 지기(志氣)가 왕성해 능력이 있을 만한 때가 아니냐”면서 대리청정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다 넘긴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인사권과 병권, 형벌권, 외교사절 접견 등 국가의 대사는 과인이 맡을 것”(1437년 3월 27일)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죽어야 속이 시원하냐’ 임금이 대리청정을 원한다고 순순히 들어주는 신하들이 어디 있습니까. 바닥에 이마를 짓찧으면서 “아니 되옵니다!”를 외쳐야지 머뭇댔다가는 대역죄를 뒤집어쓸 수 있었습니다.

영의정 황희(1363~1452)를 비롯한 대소신료들이 극력 반대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집요했습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하루에 한 동이 이상 물을 마시는 병(당뇨병)이 있고, 또 등 위에 부종(浮腫)을 앓고 있는데… 이제 또 임질(淋疾·성병이 아니라 요로결석으로 추정)이 걸렸다. 그러니….”(<세종실록> 1438년 4월 28일)

세종은 “(당뇨 때문에)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눈앞의 사람마저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호소했습니다.

1910년 무렵의 계조당 모습. 근정전 동쪽인 동궁 권역에 조성돼 있다. 계조당의 복원은 경복궁 중건 때 재건되고 보수된 건물을 모델로 삼고 있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이후 ‘대리청정하겠다’는 세종과 ‘아니 되옵니다’라고 버티는 신하들과의 다툼이 1442년까지 지루하게 이어집니다.

신료들은 ‘세자는 그저 부왕만 잘 섬기면 되는 자리’라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정사가 한 곳(임금)에서 나와야지 두 곳(임금과 세자)에서 나오면 혼란이 생긴다는 거죠. “지금의 전하(세종)와 세자(문종)라면 좋겠지만 후세에 부자지간에 틈이라도 생기면 어쩔 거냐”는 것이죠.

흔히들 세종을 두고 ‘소통의 지도자’라 평하죠.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세종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정책을 두고는 결코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1442년(세종 24) 6월 16일 “이제 그대들과 토론하자는 게 아니라 그저 내 명을 전하는 것일 뿐”이라고 세자의 대리청정을 밀어붙였습니다.

신료들에게는 “너희는 임금의 병이 깊어져 손 쓸 수 없을 정도가 돼야 대리청정을 맡기겠느냐”고 윽박질렀습니다.

당대의 인물인 성현의 는 “지금도 궁궐 안에 가득 찬 앵두나무는 문종이 세자 시절 심은 것”이라고 전했다.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세종은 밀당의 귀재 기어코 대리청정을 성공시킨 세종은 1443년 4월 17일 세자가 신료들의 조회를 받으며 정사를 펼칠 정당(집무실)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계조당입니다. 세종은 원래 계조당을 남쪽을 향해 지었습니다.

“세자가 남면(南面·남쪽을 향함)해서 정사를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대소신료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태양을 향해 앉는 ‘남면’은 오로지 군주만의 방향이라는 겁니다. 신료들은 “하늘에 두 태양이 뜰 수 없다”며 일제히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세종은 여기서는 ‘그까짓 것’ 하며 양보합니다.

‘대리청정’을 받아냈으니 ‘남면’ 카드는 슬쩍 버린 겁니다. 결국 세자는 계조당 안에서 서쪽을 향하는 ‘서면’으로 대신들을 맞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세종은 ‘밀당’의 귀재였습니다.

세종을 쏙 빼닮은 세자 세자(문종)는 29세 때인 1442년(세종 24)부터 사실상 대리청정을 시작합니다.

사실 세종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세자가 당신(세종)을 닮아 성군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겁니다.

예컨대 아버지를 닮아 학문을 좋아했던 세자(문종)는 한밤에 인적이 뜸해지면 책 한 권을 들고 집현전 학사가 숙직하는 거처까지 걸어와 밤새도록 토론했습니다. 그래서 집현전 숙직자들은 감히 관복의 허리띠를 풀지 못했답니다.

어느 날 숙직자였던 성삼문(1418~ 1456)이 밤이 늦어 세자가 행차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 옷을 벗고 누우려 했답니다.

문종의 효성은 지극했다. 아버지(세종)가 앵두를 즐기자 세자는 후원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어 앵두가 익으면 따다가 바쳤다. 세종이 그 앵두를 맛보고는 “외부에서 바친 앵두가 어찌 세자의 손수 심은 것과 같겠느냐”고 좋아했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그때 갑자기 문밖에 신 끄는 소리가 들리면서 “근보(성삼문의 자), 근보”했답니다. 이에 성삼문은 매우 놀라 허겁지겁 나가 절했답니다. 선비와 학문을 좋아하는 세자(문종)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용천담적기>입니다.

효성 또한 대단했습니다. 아버지(세종)가 앵두를 즐기자 세자는 후원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었답니다. 세종은 세자가 따주는 앵두를 맛보고는 “외부에서 바친 앵두가 어찌 세자의 손수 심은 것과 같겠냐”며 좋아했답니다. 당대의 인물인 성현(1439~1504)은 “지금도 궁궐 안에 온통 앵두나무만 자란다”(<용재총화>)고 전했습니다.

측우기의 발명자는 문종 문종은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지(1450년 2월) 불과 2년 3개월 만(1452년 5월)에 승하합니다. 39세의 창창한 나이였습니다. 원체 병약했던 데다 어머니(소헌왕후·1395~1446)와 아버지(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의 삼년상을 잇달아 치르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겁니다. 재위 기간으로만 보면 너무 짧았습니다.

하지만 대리청정까지 합한다면 문종의 치세는 사실상 10년 정도는 됩니다. 그사이 세종은 웬만한 정사를 아들에게 넘기고 훈민정음 창제(1443) 및 반포(1446)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문종의 업적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1441년 4월 29일자 <세종실록>은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합니다.

“세자(문종)가 가뭄을 근심해 비 올 때마다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쟀다.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

세종 시대의 업적 중 하나인 측우기의 발명가가 다름 아닌 세자(문종)였던 겁니다. <연려실기술>은 “문종이 천문을 잘 관측하고 후기(候氣)에 정교해 우레가 어느 때, 어느 방위에서 친다고 예언하면 반드시 적중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세종은 1436년 말에서 1437년 초에 대리청정을 공식 거론한다. “나이 40을 넘겼지만 ‘예지(銳志)’가 흐려져 90세 늙은이나 다름없다”면서 “게다가 병까지 생겨 정사를 보기가 견디기 어렵다”고 대리청정 할 뜻을 표명했다. ( 1437년 3월 27일)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문종의 치세가 오래됐다면… 1450년 절세의 성군(세종)이 승하했지만, 권력의 공백은 없었습니다. 모두 대리청정의 덕분이었죠.

문종은 특히 6품 이상까지 윤대(輪對·문무 관원이 교대로 궁중에 참석해 임금의 질문에 응대하던 일)를 허락했습니다.

<연려실기술>은 “문종이 지위가 낮은 신하라도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말씨로 응대해 언로를 활짝 열었다”고 전했습니다. 또 이민족과의 전쟁·전란사인 <동국병감>을 펴냈고, 역사서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했습니다.

만만찮은 업적은 성군 아버지(세종)의 후계자 이양 방안, 즉 ‘8년여 대리청정’의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종이 너무 일찍 승하하는 바람에 세자(단종·재위 1452~1455)가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잇는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만약 문종이 오래 왕위에 있었다면 계유정난(1453)과 같은 불행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문종은 세종의 치세를 계승했을 겁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 어린 왕의 등극으로 쓸모가 없어진 계조당은 단종 즉위년(1452) 이후 9년 만에 헐리고 맙니다. 그래도 대리청정은 후대 왕세자의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의 모델로 활용됐습니다.

바로 경종(재위 1720~1724)과 영조(재위 1724~1776), 장조(사도세자·1735~1762), 정조(재위 1776~1800, 익종(효명세자·1809~1830) 등의 대리청정이죠. 지금 복원 막바지에 경복궁 계조당에는 ‘성군의 정치’를 잇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I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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