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지리산 여자, 문명인으로 귀환하다
"소영이 왔다 가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안녕… 미처 그 아쉬움을 접지 못하고 나는 또 한 번 외쳤다. 운해가 걷힌 산자락은 투명한 메아리를 토해낸다. 내 백 번이라도 천 번이라도… 아니, 천 번이라도 만 번이라도 꼭 다시 당신을 찾겠습니다. 당신의 걸음을 따라보고, 당신의 심장을 느껴보고, 당신의 가슴에 안겨 보겠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어떠한 계기도 없었는데 왜 당신은 이리 제 가슴을 사무치게 만드는 건지요."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어찌 이렇게 절절할까? 당신의 걸음, 당신의 심장, 당신의 가슴에 자신의 온 몸을 문지르고 비비는 것을 넘어 합체하고 싶은 간절함이 뚝뚝 흘러 넘친다. 이건 읽는 사람을 꾀기 위한 작가의 거짓말 아닐까?라고 의심했는데, 틀림없이 진짜일 거라고 곧바로 생각을 고쳤다. 왜냐하면 저 글은 순천에 사는 황소영씨가 1997년 첫 번째 지리산 산행을 마치고 쓴 산행기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슴을 사무치게 만든 건 바로 지리산이다. '검은별' 황소영씨의 지리산에 대한 어마어마한 사랑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모르는 사람 있을 수 있다. 황소영은 누구고 검은별은 뭘까? 검은별은 황소영씨의 별명이다. 2000년 즈음 '블랙스타blackstar'라는 개인 홈페이지가 인터넷에 등장했고 이 사이트는 황소영씨가 쓴 지리산 산행기로 꾸며졌다.
당시 여러 등산 동호인을 비롯해 '산악인'이라고 불리는 마니아들까지 검은별 홈페이지에 들락댔다. 오로지 그녀가 쓴 지리산 산행기를 읽기 위해서였다. 지금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웹툰, 웹소설을 읽듯 수많은 산꾼이 그녀의 홈페이지를 찾아가 검은별의 산행기를 '구독'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요즘 SNS 스타를 일컫는 '인플루언서'쯤 됐다. 그로부터 20여 년 지났다. 산꾼 사이에서 '아이돌'로 통했던 그녀는 그새 잊혀진 것 같다. 검은별 사이트도 사라졌다. 지금 황소영씨는 블로그와 유튜브 <산에 가는 여자>를 운영하고 있다. 결혼을 했고, 전라남도 순천에 살며, 두 명의 자녀가 있다. 수상한 분위기, 지리산과 싸웠나? 지금 황소영과 20년 전 황소영은 같은 사람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순천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흙집과 콘크리트 아파트
황소영씨는 전남 순천시 한 아파트에 산다. 여기서 17년 살았다. 현관에는 축구공이 굴러다녔고, 거실 벽면은 아이들이 낙서한 흔적으로 어지러웠다. 곳곳에 가족의 역사가 덕지덕지 붙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말했다.
"집이 어수선하죠? 여기서 오래 살았어요. 주변에 알던 이웃들 모두 이사했어요. 우리만 남았죠."
황소영씨가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땐 35세였다. 내가 알기로 이때 그녀는 지리산 아래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한 '흙집'에서 살았다. 지리산이 좋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 때문에 여러 매체에서 그녀를 인터뷰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아가씨와 흙집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아파트에 산다. 흙집과 콘크리트 아파트는 완벽하게 다른 성질 아닌가? 그녀는 어쩌다가 변심했을까?
"원래 지리산 아래서 살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흙집'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하동에서 살던 집은 진짜 흙집이었나요?"
"네, 아궁이에 불 때는 집이었어요. 화장실은 용변을 본 후 재를 뿌려야 하는 재래식이었고요. 사람들이 그때 그랬어요. '불 때는 게 하루 이틀 재밌지, 결국 못 한다고'요. 그런데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첫 해는 너무 추워서 아궁이 앞에서 밥을 먹었는데 다음해부턴 괜찮더라고요. 씻는 것도 불편해서 화개 목욕탕 회원권을 끊어서 일주일에 한 번 목욕하러 다녔고요. 이렇게 3년 살았어요."
"지리산 아래서 잘살다가 무슨 일이 있어 도시로 이사한 거죠?"
"결혼하고 옮겼어요!"
이를 테면 그녀는 지리산을 떠나 '환승연애' 한 셈, 결혼하기 전 그녀가 지리산과 벌였던 애정행각이 굉장했다는 걸 아는 검은별 팬들은 그녀가 결혼하고 애를 낳고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삶은 특별했다. 무엇이 어떻게 특별했을까?
그녀는 1972년 충청북도 보은에서 태어났다. 그저 그런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전의 한 대학에 입학,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글 쓰는 것만큼 그녀는 야구도 좋아했다. 같은 과의 어떤 오빠가 당시 빙그레 이글스 한용덕 투수의 동생이었다. 그 오빠를 따라 빙그레 이글스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보러 갔다가 야구에 빠졌다. 다음 시즌이 열릴 때까지 야구와 관련된 잡지와 신문을 모조리 훑었다. 그리고선 다음 시즌이 시작되고 스포츠 서울 프로야구 대학생 명예기자에 신청, 대학생 기자로 활약하면서 야구를 즐겼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녀는 KBO한국야구위원회에서 여는 기록강습회에 나갔다. 2년 연속 강습회 교육을 받고 좋은 성적도 받았다. 대학 졸업 후엔 삼성 라이온즈 홍보팀에 지원했다. 그 전에 그녀는 삼성 라이온즈 홍보팀 채용 담당자에게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다.
'충북 보은에 사는 황소영입니다. 저는 스포츠 서울 명예기자로 일했고, KBO 기록강습회 2년 수강, 좋은 성적을 받았습니다. 꼭 삼성 라이온즈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그 열성이 통해 홍보팀에서 전화가 왔다.
"면접 볼 기회는 드릴게요. 원래 남자를 뽑을 건데, 기대하지 마세요."
결국 그녀가 뽑혔다. 이후 2년 동안 그녀는 삼성 라이온즈 홍보팀에서 촉탁사원(계약직)으로 일했다. 열심히 해서 우수사원 후보까지 올랐지만 끝내 정직원이 되지는 못했다. 회사에서 나온 뒤 큰 상실감이 뒤덮었다. 야구와 관련된 다른 일은 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상처받은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있던 중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여행을 가자!'였다. 첫 번째 대상지는 경주였고, 여기서 일주일 머물렀다. 여행의 재미를 느낀 그녀는 막연하게 지리산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렴풋한 결심의 원인을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때 지리산에 끌리게 된 이유를 짐작하건데, 스포츠 서울 명예기자 시절, 시즌 마지막 날 담당 기자가 저에게 책을 선물했어요. 유홍준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기> 1편이었죠. 너무 재미있게 읽고 2편을 구입했어요. 이 책에 이런 글귀가 나와요. '산은 지리산이다.' 이 글이 무의식 중에 제 뇌리에 박힌 것 같아요."
때는 1997년, 그녀의 인생은 혼란스러웠고 온 나라 또한 IMF 외환위기 때문에 떠들썩했다. 그녀는 지리산으로 갔다. 생애 첫 산행이었다. 등산, 종주, 지리산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녀는 대뜸 노고단대피소에 전화했다.
"거기 헤어드라이기 있나요? 없다면 챙겨 가도 될까요?"
끝내주게 허튼 삶
"그래서 지리산이 생애 첫 산행이었는데, 뭐가 그리 좋았을까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그러게요, 왜 좋았을까요? 그날 친구랑 같이 갔어요. 친구는 중간에 벽소령에서 하산했고, 저는 끝까지 간다고 해서 갔어요, 전날 비가 내렸는데, 비 온 다음 운해나 그런 풍경이 좋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때 써 놓은 산행기가 있는데, 잠깐만요."
그녀는 지리산 첫 산행 후 남긴 글을 인터넷 카페(지리산공동사랑구역)를 뒤적인 다음 보여줬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너무 아름다운 그 별들 때문에. (중략) 이 별을 그대에게 보여 줄 수만 있다면. 굳이 미사여구를 쓸 필요도 없다. 그 별들에겐 차라리 꾸미는 게 죄스럽다. 단지 있는 그대로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어떤 시인도 저 별을 노래하지 못할 것이며, 어떠한 화가라도 저처럼 아름다운 별을 그려낼 수 없으리라. 더 오랜 시간 그곳에 남아 잔별들을 담아 오지 못한 게 두고두고 한스럽다. 내 가슴이 막히도록 가득 품고 왔어야 했는데…'
"신기하네요. 물론 처음 산에 간 사람이라면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죠. 하지만 황소영씨는 첫 산행이 지리산 종주였잖아요. 그거 많이 힘들었을 텐데, 도중에 '여기 왜 왔을까?' '빨리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텐데요."
"그런 생각 전혀 하지 않았어요. 애인도 없고, 반지하 살았고. 서울 올라가면 다시 백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하고. 직장에서 잘려 자존감도 떨어져 있었고요. 서울에 있으면 불안했고, 지리산에 있으면 그러지 않았어요. 자신감이 생겼죠. 산에는 명품을 휘두르거나 화려하게 꾸민 사람이 없었어요. 튼튼한 두 다리만으로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지리산에 가면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군요?"
"맞아요. 그랬어요. 그래서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게 너무 싫었어요."
"서울 인근에도 좋은 산 많잖아요. 북한산, 도봉산 등등. 왜 하필 지리산이었을까요? 운명 아니었을까요? 혹시 전생을 믿나요?"
"운명이나 전생 같은 건 믿지 않지만, 산행기에 쓴 적 있어요. 나는 전생에 지리산의 한 귀퉁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퍼즐 조각 맞추듯이 내가 지리산에 딱 들어맞은 게 아닐까 생각한 적 있어요."
그 사이 그녀는 자연보호중앙협의회에 취직해 일했고 이태원에서 휴대폰도 팔았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겠다거나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계획 같은 것 없이 무미건조하게 서울 생활을 이어갔다. 주구장창 지리산에 가기는 했다. 한번 내려가면 9일씩 머물기도 했다. 틈틈이 산행기도 썼다. 그것들 중 몇 개를 각색해 등산잡지사 <사람과 산>에서 주최한 산악문학상에 응모했고 소설 부분에 당선됐다. 이것을 계기로 2년 뒤 또 다른 등산잡지 월간
<마운틴>에 입사, 기자가 됐다. 좋아하는 산에 다니면서 글을 쓰고 돈도 벌고, 좋았지만 이것 역시 그녀는 불안했다. 기자생활은 1년으로 그쳤다. 지리산 근처로 내려가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이 너무 좋았어요.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하더라도 꼭 내려가서 살고 싶었어요."
이윽고 그녀는 9년 동안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경남 하동군 화개면으로 내려갔다. 여기서 2006년 11월까지 3년간 머물렀다.
그녀는 자신의 화랑수 시절(그녀가 살던 곳은 화랑수마을이다)을 이렇게 설명했다.
"제 인생 통틀어서 가장 재밌었어요. 나 편한 대로 살았어요. 현관 문을 열면 지리산 냄새가 바로 들어왔으니까. 쌍계사 십리벚꽃길 풍경도 좋았고요. 마을 사람들도 다 좋았어요."
도시 사람인 내가 봤을 때 그녀는 이때 끝내주게 허튼 삶을 살았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심심하면 놀고. 그녀는 전생에 지리산의 한 귀퉁이가 아니라 지리산에 살았던 노루나 고라니 같은 산짐승이었을 것 같다. 원초적인 삶이 풍기는 냄새에 강하게 끌려 지리산으로 내려간 것이리라. 원초적으로 살면서 그녀는 잃은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저는 군민체질이에요. 복잡하고 사람 많은 서울보다 지방 생활이 더 잘 맞아요. 지리산에 내려와 살던 3년이 저의 리즈 시절이에요. 돈은 서울 살 때보다 없었지만 마음은 최고로 부자였거든요. 두 아이의 엄마가 돼 순천에 사는 지금도 역시 행복하고요. 만약 서울에 살았다면 (다 그렇게 사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 학원 문제나 집값 등으로 골머리를 앓지 않았을까 싶어요."
돈 벌고 싶어요
우리는 황소영씨 집에서 나와 근처 산으로 갔다. 그녀는 붉은색 스커트에 아이보리색 반팔티셔츠를 입었다. 피엘라벤 마크가 눈에 띄었다. 가지고 있는 등산복 대부분이 피엘라벤이다.
"피엘라벤을 왜 좋아하죠?"
"음, 제 체형에 잘 맞아요."
"이렇게 입고 산에 가면 말 거는 아저씨가 있을 거 같은데요?"
"네, 지나가면서 한마디씩 하는 분들이 몇몇 있어요. '아유, 장딴지가 그냥' 이런 식으로. 그런데 그게 기분 나쁘진 않아요. 저도 제 체형이 큰 건 알아요. 어깨 넓고 다리 굵고. 전혀 부끄럽지 않고, 50대에 이 정도 몸이면 꽤 괜찮다고 자부해요."
동네 뒷산이었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다리가 훤하게 드러난 치마 차림이어도 거리낌 없었다. 유튜브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섰을 때도 다른 목소리를 냈다.
"안녕하세요, 검은별입니다."
아이들은 그런 그녀를 놀린다고 했다.
"엄마! 이거 엄마 목소리 아니잖아!?"
그녀는 아이들과 아주 재미있게 지낸다고 했다.
"대부분 육아를 힘들어 하던데, 애들 키우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저는 되게 재밌어요. 애들하고 있으면 시트콤 찍는 것 같아요. 애들이랑 같이 영화 보러 다니고 캠핑도 가고 헬스장도 다녀요. 지금 첫째 아들 꿈은 프로축구 스카우터 에이전시에 들어가는 거예요. 첫째가 축구를 좋아하니 저도 축구를 좋아하게 됐어요. 이강인 유니폼도 세 벌이나 가지고 있어요!"
"애들 키우는 재미에 빠져 지리산과 멀어진 건가요? 황소영씨의 옛날 지리산과 지금 지리산은 많이 다를 것 같은데요?"
"다르네, 달라요! 옛날에는 지리산이 제 전부였어요. 지리산과 저를 떼놓고 설명할 수 없었죠. 그런데 지금은 바뀌었어요. 먼저 코로나 3년 동안 대피소가 문을 열지 않았어요. 그러니 당일 산행으로 지리산에 가기엔 힘들었죠. 또 규제가 많아졌잖아요. 옛날에는 지리산 곳곳을 다녔어요. 초암능선, 두류능선 등이오. 지금 이 코스들 말고도 여러 군데가 묶였다고 그러더라고요. 대피소에서 이제 술도 못 마시고. 지리산이 정형화됐다고 해야 할까요?"
"해외 산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나요?"
"없어요. 체력적으로 자신 없어요."
"그럼 요즘 지리산 말고 어떤 것에 관심 있나요?"
"유튜브요. <산에 가는 여자> 영상 만드는 거요. 영상 찍고 편집하는 게 재미있어요. 클릭 수를 늘리려고 '여자'를 강조했어요. 하지만 구독자 1,000명이에요. 구독자가 좀 늘었으면 좋겠어요."
"구독자가 늘면 황소영씨에게 어떤 점이 좋을까요?"
"애들 말로 '떡상'해서 수익이 나면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잘 돼서 기회가 되면 단행본 같은 것 또 내면 좋을 것 같고요."
"부자가 되면 뭘 할 건가요?"
"일단 나이가 있으니까 노후 준비를 해야죠. 지금보다 더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글 쓰는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이전의 황소영이 앞뒤 재지 않고 행동하는 원초적인 사람이었다면, 지금 황소영은 규칙을 지키고 주변을 챙기는 한편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는 문명인이라고 나는 느꼈다. 이것은 좋은 것인가? 발전인가? 더 나아진 건가? 나는 헷갈렸다.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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