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건축] 이팔청춘·팔이청춘

이승재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건축공학부 교수 2023. 6. 2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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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건축공학부 교수

일본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개인전이 강원도 원주에서 열리고 있다. 그가 설계한 캘리포니아 저택을 가수 비욘세가 2700억 원에 구매했다는 뉴스가 그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이미 28년 전 건축계의 노벨상에 해당하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거장에겐 더 이상의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다. 그는 독학으로 건축을 배우고 노출 콘크리트, 철과 유리만을 고집하는 건축가이며 설득력 있는 화술은 모두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건축가이기도 하다. 오사카의 변두리에서 쌍둥이로 태어나 목공, 금형, 유리공장에서 놀며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공고에 진학한 그는 돈벌이를 목적으로 권투를 시작했지만 높은 장벽의 실력자를 만나 이내 권투를 그만둔다. 공고 졸업 후 동네 술집 인테리어 등을 돕던 그가 헌책방에서 르꼬르뷔지에의 건축 책을 보고 건축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다. 돈이 없던 그는 책을 책방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한 달 후 그 책을 사서 읽고 또 읽고, 설계도를 그대로 베껴 그리기를 외울 정도로 반복한다. 이후 그는 고교 졸업 후 23살에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향한다. 르꼬르뷔지에가 설계한 건축물 근처에 머물면서 머릿속의 설계도와 실제 건축물을 몇 번이고 체험하고 확인한 후 그는 르꼬르뷔지에를 만나러 파리로 갔으나 그의 도착 한 달 전 이미 르꼬르뷔지에는 사망했다. 그래서 그의 독학 건축은 계속됐다. 그는 건축의 모든 것을 르꼬르뷔지에로부터 배웠고 특히 그는 르꼬르뷔지에의 롱샹성당의 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본 후 빛을 건축의 핵심 소재로 사용했다. 그가 얼마나 르꼬르뷔지에의 건축을 좋아했는가는 그의 애견을 르꼬르뷔지에로 명명하고 '꼬르'하며 불렀던 일화도 유명하다. 르꼬르뷔지에를 만나지 못한 그때부터 그는 마음속 대화를 했다고 한다. 르꼬르뷔지에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그는 28살에 안도타다오 건축연구소를 설립했으나 학벌도 실적도 없는 그에게 건축 의뢰는 없었다. 고독한 시간의 연속은 그만의 건축을 향한 갈망의 시간이었다. 건축은 회화 등과는 달리 건축주의 의뢰 없이 시작되지 않는 예술이다. 건축가에게 예술인 건축행위는 건축주에겐 투자 대비 최대한의 수익을 원하는 경제행위이기에 그 간격은 늘 존재한다. 그러나 그는 절대 건축주와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기에도 상업주의 건축에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그가 1976년 오사카의 서민 동네에 폭과 길이가 3.6m×14.4m의 콘크리트 개인주택으로 일본 건축학회상을 수상했다. 지금도 찬반 논란이 있는 스미요시 나가야라는 주택이다. 기존의 연립주택을 수직으로 삼등분해 양쪽 2층에 방을 두고 가운데에 지붕을 뚫은 정원을 뒀다. 폭 3.6m는 대략 20평 아파트의 거실 크기이다. 1층엔 입구와 연결된 거실이 있고 정원 건너 주방이 있다. 2층 양쪽 방의 통행은 좁은 복도를 이용하고, 2층의 침실에서 1층의 화장실 이동은 우산을 쓰거나 눈비를 맞으며 다니도록 계단을 설계했다. 정원의 하늘을 통해 4계절이 주는 변화를 건축물 안으로 과감히 끌어들였다. 창문도 없으며 냉난방 시설도 없다. 오로지 정원을 향한 4개의 유리문을 통해 모든 소통이 이뤄진다. 그 당시에 에너지가 필요 없는 건축물을 만든 것이다. 그는 추운 겨울 미니스커트를 입는 미인들처럼 건축적 아름다움을 위해선 추위쯤은 참으라고 건축주에게 요구한다. 1980년대 이후 교회, 미술관, 박물관 등의 공공건물을 설계하며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가 된다. 특히 바람의 교회, 물의 교회, 빛의 교회, 마음의 교회 등 교회 연작에서 그는 형태 없이 담는 대로 담는 자연의 요소를 노출 콘크리트라는 재료를 사용해 사람과의 관계를 근원적으로 인식시키고 있다. 그는 담과 벽 그리고 경사를 사용해 공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안과 밖이 하나가 되도록 해 그곳이 바로 신앙이 되고 기도가 되도록 설계했다. 그가 1997년 순혈주의로 유명한 동경대학 건축과 교수 임용 당시 고졸 출신의 교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교수들이 그의 작품을 순례 후 받아들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건축 걸작들 사이 사이엔 연전연패한 그의 도전이 있었다. 건축설계경기의 낙선은 건축 맷집이 되고 창조적 근육이 돼 그만이 가질 수 있었던 생각의 힘이 됐다. 그는 10여 년 전 암에 걸려 5개의 장기를 제거했다. 그래도 그는 절망하지 않고 매일 1만 보를 걷고 공부한다. '중꺽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그를 위한 말이다. 이팔청춘에 건축을 시작한 그가 이젠 82세이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을 좋아하는 그에겐 하루하루가 건축 스파링이다. 늘 도전한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현역이자 '팔이청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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