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살된 시신, 돌로 눌렀다”…7천명 희생 골령골의 73년

최예린 2023. 6. 28.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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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 군·경 한국전쟁 민간인 총살
“총알에 깨진 머리, 살점이 흙 위로 삐죽…”
위령제에 진실화해위원장·대전시장 불참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두 발목을 잡힌 채 총살당하기 직전의 피해자 모습.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말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발굴한 사진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50년 7월4일, 임순재는 백일을 갓 넘긴 딸의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유성경찰서로 나오라”는 통지를 따르지 않았다가는 나중에 어떤 낭패를 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내에게는 “경찰서에 들렀다 출근하겠다”고 말한 뒤 늘 그랬듯 자전거에 올랐다.

대덕군(현재 대전 대덕구) 회덕면 읍내리에서 태어난 임순재는 어릴 때부터 총명해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큰집에 손이 없어 양자로 들어갔지만,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그를 친아들로 여겼다. 일제강점기에 철도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4년 철도국에 취직해 순탄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1950년 4월 차장으로 발령받아 일하던 중에 전쟁이 났다.

여느 날처럼 자전거를 타고 출근한 뒤 임순재는 사라졌다. 가족들은 백방으로 그를 찾았다. 경찰이었던 임순재의 동서는 유성경찰서를 찾아가 그의 행적을 물었다. 같은 경찰인데도 유성서의 경찰은 “다시 묻지도 말고, 찾아오지도 말라”고 정색을 했다.

“산내로 끌려갔다더라.”

그의 행방과 관련해 ‘산내’라는 지명이 언급된 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워커> 기자 앨런 위닝턴은 1950년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을 찾았다. 그해 8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란 제목의 기사에서 그는 당시 골령골 현장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살점과 뼈들을 볼 수 있었다. (중략) 커다란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 창백한 손, 발, 무릎, 팔꿈치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 총알에 맞아 깨진 머리들이 땅 위로 삐죽이 드러나 있었다.”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란 제목의 미국 정보보고서에 첨부된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 미국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의 총책임자 레너드 애벗 소령이 촬영한 것으로,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처음 발굴해 세상에 공개했다.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제공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란 제목의 미국 정보보고서에 첨부된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 미국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의 총책임자 레너드 애벗 소령이 촬영한 것으로,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처음 발굴해 세상에 공개했다.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제공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란 제목의 미국 정보보고서에 첨부된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 미국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의 총책임자 레너드 애벗 소령이 촬영한 것으로,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처음 발굴해 세상에 공개했다.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제공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란 제목의 미국 정보보고서에 첨부된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 미국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의 총책임자 레너드 애벗 소령이 촬영한 것으로,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처음 발굴해 세상에 공개했다.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제공

위닝턴 기자가 현장을 찾은 건 1950년 7월6일부터 7월17일 새벽까지 벌어진 ‘3차 골령골 학살’ 직후였다. 임순재가 골령골로 끌려간 시점도 이때로 추정된다.

위닝턴은 기사에서 “7월16일 100명씩 실은 트럭 37대가 이동했고, 상당수의 여성을 포함해 3700명이 사살됐다”고 썼다. 그는 “총질·구타, 그리고 목을 자르는 일은 남한 경찰이 했지만 이것은 미국의 범죄”라며 “(학살은) 미군 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졌고 (학살 과정에 동원된) 운전자 몇 명은 미국인”이라고 보도했다.

앞서 골령골에서의 첫 학살은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28일에서 6월30일 사이에 일어났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부 장관 등 정부 각료들은 27일 새벽 대전으로 내려와 있었다. 다음날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여수·순천 사건 관련 사상범 일부가 대전 골령골로 끌려갔다. 

1950년 8월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쓴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란 제목의 기사에 실린 대전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 흙 위로 학살된 이들의 팔·다리 등이 드러나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50년 8월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쓴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란 제목의 기사 표지.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제공

대전 동구 낭월동에 있는 골령골은 인적이 드문 골짜기였다. 미국 육군 방첩대(CIC) 파견대의 전투일지는 6월28일부터 사흘간 골령골에서 1400명이 총살됐다고 기록한다. 당시 총살을 집행한 경찰 책임자는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사형목인 기둥 10개를 박아놓고 사형수 눈을 가리고 뒤에서 나무기둥에 손을 묶었다. 7m 전방에서 사수가 탄환 1발씩 장전된 M1으로 사살했다. (헌병) 지휘자의 구령에 따라 (헌병들이) 발사하면 사형수는 고개를 푹 떨궜다. 그러면 지휘자가 확인사살을 했다. 확인사살이 끝나면 소방대원이 손을 풀고 시신을 미리 준비한 장작더미에 던졌다. 시신이 50~60구씩 차면 화장을 했다.”

1950년 7월1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은 비밀리에 대전을 떠났다. 대통령이 떠난 그날 새벽, 대전지검 검사장은 대전형무소에 ‘좌익 극렬분자를 처단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4천명이 수용돼 있었다. 7월2일 당시 제2사단 헌병대는 대전형무소 쪽에 “좌익수들, 즉 포고령·국방경비법 위반 등 주로 여순반란사건 (관련자), 보도연맹원, 10년 이상 강력범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다음날 재소자들은 골령골로 끌려갔다. 당시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장은 그때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라. 뒤에서 쏘면 피와 골 허연 것이 튀어 바지가 엉망이 돼.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요. 헌병 지휘관이 청년 방위대에게 산 위에서 돌을 굴려 와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요.”

5일 동안 계속된 2차 학살의 희생자는 1800~2천명으로 추정된다. 1950년 6월28일~7월17일 3차에 걸쳐 7천여명이 골령골에서 집단 사살된 것이다.

2021년 9월10일 골령골 학살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들 모습. 최예린 기자
2021년 8월6일 대전 산내 학살 희생자 유해발굴단 연구원들이 골령골 현장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발굴단 제공
2021년 골령골에 발굴된 학살 희생자 유해들. 최예린 기자

■ 북한 이적 가능성을 없애라

우리 군과 경찰이 자국민을 상대로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로도 대전형무소는 ‘절도범’과 ‘사상범’으로 가득했다. 해방 뒤 남한에서 좌우 대립이 심해지고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소요가 확산되면서 갇히는 사람들은 더 늘었다. 1948년 3월 1875명이었던 대전형무소 수용자는 1949년 3041명으로 급증했다. 그중에는 여순사건과 제주4·3 관련자들도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6월5일 좌익 계열 전향자들을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반공단체에 가입시켰다. ‘좌익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였지만, 실적에 눈먼 공무원들은 좌익과 관련 없는 이들까지 마구잡이로 가입시켰다.

1950년 6월25일 전쟁이 터지자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 도 경찰국에 ‘요시찰인 전원을 경찰에 구금하고 형무소 경비를 강화하라’는 내용의 비상통첩을 보낸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은 경찰서, 면사무소 창고, 형무소 등에 구금됐다. 그리고 6월28일 골령골에서 첫 학살이 일어났다.

■ 아버지 한, 풀어드릴 수만 있다면

임순재의 딸 임남신(73)씨는 출근길에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아버지를 평생 그리워했다. 가족들은 임순재가 ‘산내로 끌려갔다’는 소문에 시신이라도 찾아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들 찾기에 몰두하던 할아버지는 곡기를 끊고 앓더니 세상을 떠났다. 가세는 점점 기울었고, 남신씨가 12살 때 어머니는 재가했다. 할머니 밑에서 자란 남신씨는 ‘부모 잃은 대전’이 싫어 대구로 시집을 갔다.

골령골 학살 희생자 임순재씨의 딸 임남신(73)씨가 지난 2일 대구 자택에서 <한겨레>와 만나 아버지와 찍은 유일한 사진을 들고 울먹이고 있다. 최예린 기자

남신씨는 2020년 12월 출범한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 2005년 발족한 1기 진실화해위는 2010년 “전시였지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수감된 재소자들을 좌익 전력이 있거나 인민군에 동조할 것이 우려된다는 이유만으로 적법한 절차 없이 사살한 것은 명백한 불법 행위”라며 “이에 대한 책임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국가에 귀속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광동 진실화해위 위원장은 최근 한국전쟁 전후 시기 불법적으로 이뤄진 민간인 집단사망 사건의 피해자들이 보상받는 것과 관련해 “심각한 부정의”라고 발언해 유족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골령골에 2024년까지 들어설 예정이었던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시설’은 공사 첫 삽조차 뜨지 못한 상태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골령골에서 발굴된 유해는 1441구다.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와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는 2000년부터 매년 6월 ‘골령골 학살 희생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올해도 27일 골령골에서 위령제가 열렸다.

위령제에 참석한 남신씨는 억울한 영혼을 달래는 종교제례를 바라보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김광동 진실화해위 위원장과 이장우 대전시장은 이날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2010년 이후 매년 보내온 대전시장 추도사도 올해는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찍은 백일 사진을 들고 남신씨가 울면서 말했다. “사진 속 아버지를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어요. 억울한 우리 아버지 죽음 못 밝히면 눈도 제대로 못 감을 것 같습니다.”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2021년 8월 골령골 초입에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골령골’이라고 적힌 리본이 걸려 있다. 최예린 기자
골령골에 세워진 추념비. 최예린 기자
현재 골령골의 모습. 2020년부터 3년 동안의 유해 발굴을 마치고 평평하게 다져진 상태다. 이 자리에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제공
지난해 6월27일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 골령골에서 열린 ‘산내 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전미경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이 제사상에 술잔을 올리고 있다. 최예린 기자
임남신씨가 27일 오전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서 열린 ‘대전산내골령골학살사건 73주기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최예린 기자
27일 오전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서 열린 ‘대전산내골령골학살사건 73주기 희생자 위령제’에서 전미경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이 초헌을 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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