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6, 진보 3′ 美 연방대법… 그래도 판결은 공정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이 보수 성향 남부 주(州)를 상대로 “현재 선거구 획정이 흑인에게 불리하니 조정하라”는 판결을 잇따라 내리고 있다.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이 9명 중 6명(대법원장 포함)인 보수 절대 우위의 구도에서 나온 예상 밖 판결이다. 이번 판결뿐 아니라 최근 미 대법원에선 보수 대법관들이 통상적 이념 구도를 탈피해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진보 성향 대법관들과 한편에 서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이념보다는 법리를 따른 보수 대법관들의 판결은 진보 진영도 예상치 못한 경우가 많다. 소수 인종 우대 정책(어퍼머티브 액션), 학자금 탕감 등 굵직한 이슈에 대한 판결이 예정된 가운데 내년 대선을 앞두고 대법원의 ‘뻔하지 않은 선택’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 대법원은 26일(현지 시각) 루이지애나주 선거구 획정이 흑인 유권자에게 불리하게 짜여 있다며 흑인 유권자들과 민권 단체들이 주의회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대해 “심리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원고들은 “공화당이 장악한 주의회가 흑인을 한 선거구에 고의적으로 몰아 흑인 투표권을 희석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급심 재판부는 루이지애나의 흑인 비율(33%)을 감안하면 현재 선거구 획정은 불합리하다며 원고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이 확정될 경우 루이지애나 전체 선거구 7곳 중 흑인 유권자가 밀집된 선거구가 현행 1곳에서 2곳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흑인 지지세가 강한 민주당에 유리해지는 것이다. 이날 대법원의 결정으로 이 사건은 당분간 하급심 판결 효력이 유지된다.
27일에도 대법원은 선거구를 공화당에 유리하게 획정한 주 의회의 결정에 제동을 건 주 대법원의 판결이 정당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공화당이 반발할만한 판결이었지만, 보수 성향의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브랫 캐버노 대법관,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이 진보 성향 대법관 3명과 함께 진보 진영에 유리한 판단을 내렸다.
앞서 대법원은 이달 초에도 비슷한 판결을 내렸다. 역시 흑인 비율(27%)이 높은 앨라배마주 흑인 유권자들과 민권 단체가 제기한 소송에서 “현행 선거구 획정이 불합리하니 흑인 인구 비율에 맞춰 재조정하라”고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보수 성향 로버츠 대법원장과 캐버노 대법관이 진보 대법관 3명과 의견을 같이한 의외의 결정을 하면서, 5대4로 진보 진영에 유리하게 판결했다.
그보다 사흘 전에도 민주당·진보 진영이 반색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때의 강경 이민 통제 정책을 대폭 완화해 ‘공공 안전에 위협이 되는 인물’에 한해서만 추방할 수 있게 한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에 대한 판결이었다. 대법원은 공화당 강세인 텍사스·루이지애나주가 제기한 소송에서 하급심 판결을 뒤집고 ‘바이든 행정부 정책이 옳다’고 판결했다. 이 소송에선 새뮤얼 앨리토 대법관을 제외한 보수 성향 대법관 5명이 진보 성향 3명과 한편에 섰다.
이 같은 보수 대법관의 탈(脫)이념 판결이 잇따라 나오자, 미국 정가는 배경 분석에 분주한 모습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보수 우위의 대법원이 최근 진보 성향으로 기울어 (판결 방향이) 혼조세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미 연방 대법관은 통상 어느 당 행정부에서 임명됐느냐에 따라 보수(공화당) 또는 진보(민주당)로 구분된다. 낙태나 총기 소유 등 미국인의 일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 대법원은 대체로 이념 지형에 부합하는 판결을 내려왔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판결에선 이념이나 정파를 탈피해,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에 기반해 판단하는 흐름이 두드러진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15일 나온 ‘인디언 어린이 복지법(ICWA)’ 관련 대법원 판결이 대표적인 사례다. 민주당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인 1978년 제정된 이 법은 원주민 혈통 보존을 위해 인디언 어린이의 백인 가정 입양을 제한하는 내용이 골자다. 바이든 행정부도 이 법의 존치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그런데 보수 대법관 4명이 진보 대법관 3명과 의견을 같이하면서 압도적(7대2)인 존치 결정이 났다.
보수적 판결이 나오긴 했지만, 보수 대법관 한두 명이 진보 성향 판사들과 뜻을 같이하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 22일 미국 최대 인디언 부족인 나바호족이 ‘필요한 수자원을 확보해달라’고 연방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을 5대4로 기각했는데, 보수 대법관 중에서도 강경파로 알려진 닐 고서치 대법관이 진보 대법관 3명과 의견을 함께해 원주민 편에 서서 눈길을 끌었다. 여성들의 낙태 권리를 보장해온 ‘로 대 웨이드 판례’가 지난 6월 50년 만에 폐기될 때는 로버츠 대법원장이 진보 대법관들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었다.
NBC 등은 보수 대법관들의 잇단 ‘탈이념 판결’이 내년 선거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과 하원 다수당 탈환을 동시에 노리는 민주당에 일단 호재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곧 판결을 앞둔 대형 사안에 대해서는 기존 이념 지형대로 갈라질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많다. 대법원은 이달 말 대학과 기업의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의 위헌 여부, 바이든이 대학 학자금 부채 탕감을 행정명령으로 결정할 권한이 있는지 여부, 특정 기업들이 동성 결혼식 서비스를 거부할 권리가 있는지 여부 등 굵직한 사안에 대해 잇따라 판결할 예정이다. NYT는 “대법원이 7월 초 여름 휴정기 전 발표하게 될 ‘블록버스터급’ 사건들의 향방에 워싱턴 정가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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