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그들은 정동 뒷골목에서 과학과 기술 혁명을 꿈꿨다

박종인 선임기자 2023. 6. 2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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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공화국 대한민국⑥ 정동(貞洞) 시대 과학기술처와 원자력병원
서울 한복판 세종로사거리 뒷골목에 있는 사무실건물 ‘사조빌딩’(왼쪽 흰 건물)은 대한민국 과학기술 혁명이 태동한 역사적인 장소다. 1959년 이승만 정부가 만든 원자력원은 4년이 지난 1963년 뒤 이 자리에 건물을 신축하고 방사선의학연구소를 개설했다. 그리고 또 4년이 지난 1967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처 첫 사무실이 이 병원 건물에 입주했다. 1970년 과기처가 종합청사로 이전할 때까지 이 건물에서 이승만 정부가 만든 과학기술의 산실과 박정희 정부가 신설한 과학기술 근대화 작업실이 공생하며 대한민국을 이끌었다./박종인 기자

정동 2번지 수상한 건물 하나

1963년 9월 13일 서울 광화문 네거리 뒷골목에 정체 모를 건물이 들어섰다. 주소는 중구 정동 2번지였다. 완성된 외곽 생김새는 여느 고층건물과 달랐다. 니은 자 형태로 지은 건물은 골목길 쪽으로 창문마다 사방이 시멘트 격벽으로 가려져 있었다. 골목길 쪽 건물은 3층이고 뒤쪽 건물은 4층이었다. 널찍한 주차장이 뒤편에 있었는데, 당시 차량 대수가 그런 넓은 주차장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었다. 석 달이 지난 그해 12월 17일 건물 용도가 밝혀졌는데, 현관에 걸린 현판을 보니 ‘방사선의학연구소’였다. 그 무시무시한 원자폭탄에서 나오는 그 방사선으로 사람을 치료한다는, 원자력병원의 전신이다.

그리고 3년 4개월이 지난 1967년 4월 21일 더 무시무시한 일이 이 건물에서 벌어졌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가 이 좁은 골목에 찾아와 삼엄한 경비 속에 건물 입구에 또 다른 기관 현판을 직접 내거는 게 아닌가. 현판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과-학-기-술-처’.

1959년 이승만 정부가 씨앗을 뿌린 원자력과 박정희 정부가 야심 차게 시작한 과학 근대화 작업 합동 아지트가 탄생한 날이었다.

1970년대 서울 정동에 있던 한국원자력병원 현관과 외관 모습(왼쪽). 오른쪽은 1967년 4월 21일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원자력병원(당시 방사선의학연구소)에 입주한 과학기술처 현판식에 참석한 장면이다. 박정희 앞은 초대 과기처장관 김기형./한국원자력연구원, 국가기록원

돈이 되는 과학

1965년 5월 18일 대한민국과 미국은 베트남 파병과 응용과학연구소 설립이라는 약속이 담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때 대한민국 대통령은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에서 열린 교민 환영회에 참석했다. 교민 가운데 김기형이라는 사람과 악수를 하며 박정희가 물었다. “하는 일이?” “박사를 따고 전자산업 연구개발실에서 전자 부품 개발 연구 중이다.” 김기형은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박사를 딴 마흔 살 된 사내였다. 대통령이 떠나기 전 김기형이 말을 이었다. “전자 부품을 따발총 쏘듯 생산하고 불량품은 자동 선별하고 합격품은 자동 포장해 판매한다. 단가는 1달러 정도다.” “다시 만나기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대통령은 자리를 떴다.

그리고 1966년 7월 김기형에게 전보 한 통이 도착했다. ‘조국 근대화에 동참하시라.’ 김기형은 바로 귀국했다. 그리고 1967년 4월 13일 김기형은 대한민국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에 임명됐다. 첫 만남 후 7년이 지난 1972년 덕수궁에서 제1회 전자 부품 전시회가 열렸다.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아 있던 박정희가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인 김기형을 부르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때 1달러라고 했지?”(김기형, ‘과학기술처 출범과 박 대통령’,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 MSD미디어, 2010. pp.267~271)

정치, 권력 그리고 과학

1967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박정희 후보는 ‘조국 근대화’를 선거 구호로 내세웠다. 투표일을 열흘 정도 앞두고 박정희 정부는 과학기술처 설치를 전격 결정했다. 과학기술처는 선거운동 기간인 그해 4월 21일 개청됐다. 박정희는 선거 유세 동안 이렇게 공격적으로 야당에 독설을 날리곤 했다. “몸은 20세기에 살고 있는데 머리는 19세기에 살고 있다.”(김근배 등, ‘과학대통령 박정희 신화를 넘어’, 역사비평사, 2018, pp.35~36)

박정희가 과학기술을 권력 유지와 재창출에 활용했다는 비판이 없지 않다. 이들은 ‘과학기술은 최고 통치자의 열정보다 정치적 의도와 맞물리며 추진되곤 했다’고 비판한다.(김근배, 앞 책, p38) 정치인이니 순수 열정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로지 정치적 의도만으로 과학기술 육성을 주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에게 과학기술은 경제 자립을 위한 도구였다. 그래서 ‘단가 1달러’를 주장한 40대 사내를 장관에 앉혔고 6년 뒤에도 그 ‘1달러’를 기억한 정치인이었다. 초대 KIST 소장 최형섭이 장기 연구 대신 단기 응용기술 연구를 위한 연구소를 주장한 이유도 동일했다. 과학기술을 통해 빨리 부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1986년 12월 4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원 44명 출정식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김병구(유체계통설계실장) 김덕승(기획부장) 이상수(환경관리센터장) 임창생(원자력사업본부장) 한필순(소장) 김동훈(부소장) 이창건(원자력연수원장) 전풍일(원자력정책연구부장) 김시환(경수로핵연료사업부장) 유성겸(행정부장). 그 뒤편으로 태평양을 건널 젊은 연구원들이 서 있다. 현 원장인 주한규(위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안경 낀 사람)도 그 가운데 끼여 있다.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하나하나 대한민국 원자력의 아버지들이다. 이들은 소장 한필순과 함께 “필(必) 설계기술 자립!”을 외치고 미국으로 떠났다./한국원자력연구원

원자력, 발전에서 치유까지

1959년 이승만 정부는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다. 이어 원자력원이라는 상급기관도 설립됐다. 이승만 정부 원자력 이용 분야는 전력 생산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1963년 원자력원은 방사선의학연구소를 신설했다. 1963년 9월 서울 정동 2번지에 원자력원 건물을 짓고 12월 17일 방사선의학연구소가 출범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10일 연구소에 암병원이 신설됐다. 병원은 1973년 ‘원자력병원’으로 개칭됐다.

지금은 유수 의료기관에서 암을 치유하고 있지만 의료환경이 열악했던 1960년대 원자력병원은 획기적인 암 전문 의료기관이었다. 정동 건물은 그 의료 활동에 최적화된 건물이었다. 지금도 사대문 안에서 보기 드문 주차장도 병원용이었고 격벽으로 서로 차단된 사무실 창문도 목적이 동일했다.

국내 암환자가 급증하면서 원자력병원은 1973년 2월 17일 원자력연구소 직속 병원으로 개편됐다. 건물 입구에는 ‘원자력연구소 원자력병원’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영문명은 ‘Korea Cancer Center Hospital’, 말 그대로 암병원이다.

정동에 모여든 과학기술

“거, 쟁이들이 모여 귀찮기는 하지만 그들을 통해 과학기술이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1966년 경제기획원 차관 김학렬)(전상근, ‘한국의 과학기술정책’, 정우사, 1982, p102) 대한민국 정부 과학기술정책이 가속이 붙으면서 정통 ‘문과’ 관료들도 과학기술의 가치를 조금씩 깨달아갔다. 그리하여 해방 후 대한민국 과학기술자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과학기술 전담 부서, 과학기술처가 탄생했다. 물론 재선을 노리는 정치인 박정희 야심도 한몫을 했다. 장관은 국무위원 서열이 24명 가운데 23번이었다.

선거가 임박한 1967년 4월 21일, 정동 원자력병원 건물 절반을 빌려 과기처가 문을 열었다. 이듬해 한 층을 증축할 정도로 직원도 늘었다. 골목 맞은편은 다방이고 바깥쪽은 대폿집과 식당이 늘어서 있었다. 바로 이날 4월 21일이 ‘과학의 날’로 지정됐다.

‘쟁이들을 이해하게 된’ 관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아니었다. 일반 국민까지 기술을 천시하는 유교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과기처는 기술진흥과 함께 그 전근대 시대정신을 타파해야 하는 책임을 맡아야 했다.(이응선 등, ‘과학기술 선진국을 이룬 숨겨진 이야기들’, 한국기술경영연구원, 2012, p16)

정동 2번지는 대한민국 과학입국의 둥지였다. 정권이 숱하게 바뀌고 과기처 명칭도 바뀌었어도 ‘과학’과 ‘기술’은 변함이 없다.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이 ‘칼국수’를 상시로 내놓자 식품공학 전공 과학기술부 자문위원이 “콩국수가 건강에 좋다”고 하자 곧 메뉴가 콩국수로 바뀌기도 했다. 당시 장관은 “대통령이 ‘과학자 말은 무조건 믿는다’더라”라고 전했다.(이응선, 앞 책, p51)

정동 2번지에서 공생했던 과학기술처는 1970년 정부종합청사 완공과 함께 둥지를 떠났다. 원자력병원은 1972년까지 연인원 48만명을 원자력 즉 방사선으로 치료했다.(‘한국원자력연구원60년사’, p20) 원자력병원은 1984년 서울 노원구 공릉동으로 확장 이전했다. 훗날 원자력 가운데 의학 부문은 한국원자력의학원으로 독립했다. 2년 뒤 1986년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젊은 연구원 44명을 미국으로 보냈다. 당시 소장 한필순이 그들에게 던진 화두는 ‘필(必) 설계기술 자립!’이었다. 1967년 과기처 개청식 때 대통령 축사도 동일했다. “과학기술 진흥은 경제 자립을 가능케 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김근배, 앞 책, p36)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첫 둥지 정동 2번지 건물은 민간에게 매각돼 지금 맥줏집과 식당과 각종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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