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나의 친구여, 나는 아직 시작도 못 한 기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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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사람은 집을 사지도 못하고, 1등칸을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룰렛 도박도 하지 못하고 철갑상어 수프도 먹지 못한다. 그들은 간신히 배를 채울 수 있을까 말까 한 음식을 먹고, 가구가 딸린 방을 빌려서 살고, 교통수단은 자기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다."
"방에서 혼자 글을 쓰는 것이 내 삶의 거의 전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티를 즐기듯이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즐깁니다"(필립 로스)고 말할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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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사람은 집을 사지도 못하고, 1등칸을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룰렛 도박도 하지 못하고 철갑상어 수프도 먹지 못한다. 그들은 간신히 배를 채울 수 있을까 말까 한 음식을 먹고, 가구가 딸린 방을 빌려서 살고, 교통수단은 자기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다.”
1885년 안톤 체호프가 적었던 이 문장을 나는 최근 발간된 책 ‘먹고살고 글쓰고’에서 정보라 작가의 인용으로 읽었다.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라 더 유명해진 정보라 작가이지만, 현재 한국 작가들의 형편도 당시와 대략 비슷하다고 진단한다.
“방에서 혼자 글을 쓰는 것이 내 삶의 거의 전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티를 즐기듯이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즐깁니다”(필립 로스)고 말할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파티를 즐기기는커녕 음식점에서 서빙하거나 공연장 스태프 아르바이트를 한다. 올해 마주친 동료 작가들의 직업을 떠올려 본다. 그들은 출판사 편집자, 목수, 카페 바리스타, 시간강사, 서점 직원 등 먹고 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들은 ‘자기만의 방’을 가질 엄두조차 낼 수 없어 카페나 도서관에서 짬짬이 글을 쓴다.
“사는 게 우선인데 왜 글을 쓰는가?”는 질문은 가끔 폭력적으로 들린다. 위에 언급한 책 ‘먹고살고 글쓰고’에 실려 있는 답변을 인용해 보겠다. “더는 아무런 희망도 영광도 없이. 그런 것 없어도, 그 순간에조차 누군가에게 문학은 너무나 재미있는 것이었고, 문학을 하지 않으면 하나뿐인 잔인한 삶을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았기에, 문학이 그의 십자가였기에.” (송승언 시인) “당신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행운아다.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고약한 일을 당했을 때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우리는 이를 악물고 종이에다 그 일을 두드려 댈 수 있지 않는가.” (김현진 작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나 세상을 덜 미워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언어로 창작을 하는 것이 씨앗을 땅에 심는 일이나 자동차를 만드는 일이나 로켓 발사보다 덜 중요한 일이라고 말해도 작가들은 계속 쓸 것이다. 생업과 창작이 배타적 관계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엔 서울국제도서전에 갔다. 내가 한가득 책을 들고 부스와 부스 사이를 지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몇 해 전 서울의 한 대학에서 내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었다. “언제 왔니? 어떻게 지내고 있어? 책 많이 샀어?” 나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한꺼번에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오늘 기차 타고 왔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 가까운 대학교 대학원에서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부모님 댁에서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는 게 제자의 답변이었다. 그녀는 현재 시는 조금 뒤로 하고 소설 창작에 집중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우리는 인파에 떠밀렸지만 서로의 쓰는 일을 귀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더 가까워지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제자에게 달리 해줄 게 없어서 내가 샀던 책 가운데 한 권을 선물하고 헤어지는 데 마음이 아렸다.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존경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잠실 학생체육관에 콘서트를 보러 갔을 때 덜덜 떨며 진행요원으로 일하는 제자를 마주쳤을 때도, 대형 중고서점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파리한 안색의 제자와 문득 대면했을 때도 그들은 웃으며 이야기했고 꿋꿋하게 쓰고 있다고 말했으니까.
지금 나는 서울국제도서전 작은 부스에서 책을 사고 사은품으로 받은 볼펜을 만지작거린다. 쓰는 일은 미칠 만큼 외로운 일이다. 볼펜과 시인이 서로 ‘나의 친구여’라고 부르는 환청을 듣는다.
“볼펜심처럼 말라서/옥상이 친구였던 시절이 있었다//떨어질 생각은 아니었다/볼펜이 있으니까//지금도 지나가는 문구점의 볼펜들이 부른다/나의 친구여//번번이 친구를 사 오지만/친구도 대체로 내 마음 같지 않은 법//한나절 내내 볼펜을 생각하지만/대체로 하고 싶은 말과/같지는 않은 법//나의 친구여/나는 아직 시작도 못 한 기분이지만/떨어질 생각은 없답니다/볼펜이 있으니까 (김경미, ‘그 무덤의 연필통’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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