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거리두기] ‘프로파간다 정치’의 위험
“민주주의가 치명적인 적들에게 파괴 수단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항상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좋은 농담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프로파간다’라는 말을 들으면 즉각 떠올리게 되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말이다. 나치의 최고 선전가이자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제3 제국의 대중계몽선전국가부 장관은 정교한 선전(宣傳)을 권력 장악과 국민 동원의 정치적 수단으로 끌어올렸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우리는 선전과 선동을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 그리고 마오이즘과 같은 전체주의와 즉각적으로 연결한다. 우리가 선전과 선동을 부정적으로 인식해 금기시하고, 프로파간다라는 용어를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프로파간다는 오직 전체주의 정권의 전유물인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프로파간다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것은 결코 프로파간다라는 독특한 현상에 관한 정치철학자의 이론적 질문이 아니다. 요즘 우스꽝스럽게 돌아가는 현실정치의 꼬락서니를 보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있었던 국회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보라. 연설은 프로파간다의 대표적인 수단이지만, 연설을 듣는 사람이 없으니 연설을 통해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합리적으로 전달하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발언이 끝날 때마다 조롱과 야유의 추임새가 난무하는 모습은 국회에서 합리적 토론과 심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국회의 심의 정치가 멈추는 곳에서 ‘프로파간다의 정치’가 시작한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는 프로파간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에 거리를 두면, 우리는 프로파간다가 전체주의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선전은 본래 주의나 주장을 많은 사람이 알고 이해하도록 잘 설명하여 널리 알리는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인 선전과 광고, 홍보와 마케팅은 모두 ‘널리 알리는’ 프로파간다의 일종이다. 자신이 믿는 정치적 이상을 널리 알려 더 많은 사람이 동참하도록 이끄는 ‘정치적 수사학’도 역시 프로파간다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프로파간다, 민주주의에도 존재
프로파간다 없이는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다. 플라톤 이래 프로파간다는 정치의 주요 관심사였지만,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 정권에 의해 오염되어 우리는 프로파간다를 애써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프로파간다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도 실질적으로 존재하는데도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프로파간다가 프로파간다라고 인식되지 않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커다란 위험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자본주의적 광고 선전의 폭격을 받으면서도 그 해악을 느끼기는커녕 상품을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는 것처럼,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이상으로 삼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이 믿는 정치적 이상을 과도하게 알리기 위하여 자신도 모르는 채 프로파간다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최근의 두 가지 사건을 살펴보자. 하나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관한 정치적 담론이고, 다른 하나는 퀴어 축제에 대한 홍준표 대구시장의 정치적 발언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민 생명과 건강을 위해서 철저하고 투명한 오염수 검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이 발언에 문제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민 건강과 생명과 관련된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에 대한 철저한 과학적 검증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국회에서 그 방법을 논의하자는 제안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경고’처럼 들린다. “오염수인지 처리수인지 핵 폐기물인지 알 수 없지만 일본의 오염수 방출이 인체에 유해하고 적절하지 못한 부당한 행위임은 분명하다.” 이 말은 결코 토론과 심의를 통해 알아보자는 열린 태도가 아니다. 이 말은 확신의 산물이다. 이 확신은 우리 국민의 건강에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일본의 어떤 조치도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는 선전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같은 뜻의 말이라도 어떤 용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듣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알고 있다. 프로파간다는 오늘날의 페이크 뉴스처럼 신념과 감정에 호소한다. 정치적 입장과 신념에 따라 오염수가 ‘처리수’가 되기도 하고 ‘폐수’가 되기도 한다. 처리수라는 용어를 쓰면 우리의 수돗물처럼 방류 방법과 절차에 집중하게 되고, 폐수라는 용어를 쓰면 우리의 건강과 생명에 치명적이기 때문에 무조건 막아야 하는 운동의 대상이 된다. “기준에 맞는다면 마시겠다”고 발언한 한덕수 국무총리에게 “일본인 대변인 노릇을 하는 게 아닌가”라는 이재명 대표의 말은 경고의 대상을 오염수에서 일본으로 확장한다.
여기서 프로파간다의 작동방식이 드러난다. 이재명 대표는 오염수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청중들에게 오염수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오염수를 철저하고 투명하게 검증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옳다. 프로파간다가 반드시 거짓일 필요는 없다. 이 주장이 프로파간다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해 합리적 토론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적 수사학은 오염수는 치명적이고, 치명적인 오염수를 배출하는 일본 정부는 나쁘다는 식의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가 설령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오염수 논의는 반일주의를 부추길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프로파간다는 토론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논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우리의 합리적 의지를 조작한다.
결국엔 민주주의 심각하게 위협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프로파간다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지금 유례없는 공권력 대 공권력의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대구 퀴어 축제에 관한 논란은 사실 홍준표 시장의 말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소셜 미디어에 게재한 글은 이 나라 보수진영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를 잘 보여준다. “성소수자의 권익도 중요하지만 성다수자의 권익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언뜻 별문제 없어 보이는 이 말은 사실 궤변이다. 만약 모든 사람의 권리는 집단의 규모와 상관없이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이라면, 이 말은 맞다. 성다수자의 권익이 중요한 것처럼 성소수자의 권익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말의 순서를 바꿨을 뿐인데 그 의미는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성다수자의 권익 못지않게 성소수자의 권익도 중요하다는 말은 성소수자의 권리가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풍토로 인해 제대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차별 의식이 전제된다. 이에 반해 “성소수자의 권익도 중요하지만 성다수자의 권익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말은 소수를 배제하고 다수의 지배를 당연시하는 정치적 태도이다. 성소수자의 권익도 중요하다는 말은 단지 위선적 헛소리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다수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다수는 옳고, 소수는 틀렸다는 인지적 편향이 뿌리 깊게 내리고 있다. 홍준표 시장은 퀴어 축제가 청소년들에게 잘못된 성문화를 심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 혐오감을 준다고 확신한다.
보수의 아이콘이 되어 표를 결집하려는 홍준표 시장의 의도가 성공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가 분명하게 보여준 것은 보수진영의 프로파간다 작동방식이다. 우리 주위에는 물론 퀴어 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다양성을 민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포기한 것이다. 그의 정치적 수사가 프로파간다인 이유는 지극히 선명하고 간단하다. 그는 성소수자의 문제를 혐오감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불법집회에 관한 담론은 성소수자의 문제와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회 안정의 문제를 다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또 소수자 집단에 대한 차별을 다수의 의지로 정당화하는 것이 보수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신념과 신념이 충돌하는 곳에 합리적 토론과 민주적 심의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널리 퍼뜨리려는 프로파간다가 오늘날 프로파간다로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좌든 우든 모두 자유민주주의 이상을 따른다고 공언하지만, 오늘날 정치적 수사는 비자유주의적 관행에 의해 압도당하고 있다. 모두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한다. 단,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는다. 소수이든 다수이든 타인을 존중하고 고려하지 않는다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프로파간다는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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