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짓고 돌보고…건축의 동력은 ‘사랑’이었다[공감의 건축-또 다른 건축을 향해]

기자 2023. 6. 27.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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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에필로그 - 건축 : 사랑과 돌봄을 말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어린이 미술관에서 가족이 함께 즐기고 있다. 오늘날 미술관은 작품, 작가뿐 아니라 관객과 비인간을 위한 장소이기도 하다. 아이린 유 제공
연재 통해 만난 여성 건축가들
환경에 대한 공감과 연대 환기
건축이라는 지난한 과정에서
상상력을 완성하는 힘 깨달아

‘공감의 건축: 또 다른 건축을 향해’ 연재를 제안받았을 때 나는 1년간의 육아 휴직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한창 아이와 서울 이곳저곳을 산책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초등학생인 아이는 코로나19가 발발했을 때 입학한 ‘코로나 키즈’다. 입학과 동시에 학교는 폐쇄되었고, 한동안 소풍이나 체육대회를 비롯한 대면 행사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아이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시간이었다. 그사이 한국 사회의 공간 경험은 고도로 양극화되었다. 학교뿐만 아니라 여러 공공장소가 한동안 무력하게 문을 닫았다. 모두가 함께 누렸던 도시는 사적 영역이 더 강화됐다. 코로나19가 장기간 지속되는 동안 나는 도시에서 공간을 누리는 경험과 새로운 곳을 찾는 용기가 모두 축소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아이와 갈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고작 쇼핑몰이나 키즈카페밖에 없다는 말을 뒤집듯, 나는 전공을 살려 아이와 즐길 수 있는 열린 장소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도서관과 미술관, 공원은 물론이고 구도심의 허름한 카페, 신도시의 정갈한 오피스 로비까지. 우리는 도시의 다채로운 분위기를, 건물의 다양한 감촉을, 거리의 복잡한 냄새를 수집했다. 그 감각은 내가 공부나 업무로 건축을 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국내외 최고의 건축가들과 교류하며 기념비적인 건축물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던 내가 쉽게 발견하지 못했던 배움이었다.

연재를 진행하며

일터인 미술관으로 복귀한 나는 아이와 도시를 둘러본 앞선 경험들을 글의 발판으로 삼아 연재를 시작했다. 내가 그간 탐구해온 건축 지식을 잠시 밀어놓고 다음 세대에게 필요한 건축의 가치와 의미를 담고자 했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고 다시 문을 연 물리적인 공간들을 귀하게 여기고 새롭게 보는 방식들을 건축가의 작업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이와 다닌 장소들을 다시 살펴보니 흥미롭게도 대다수가 평소 관심 있던 여성 건축가들의 작업이었다는 점도 발견했다. 지면에 소개한 공간을 여성 건축가들의 것으로 국한시킨 이유는, 그간 미디어에 주로 노출된 남성 건축가의 작업보다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은 작업들을 모아 건축에 관한 다른 안내도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건축가 서혜림부터 강예린까지 연재를 계기로 만난 건축가들의 작업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힘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들이 만든 도서관, 공원, 어린이집, 주택, 오피스, 근생시설, 구청, 카페, 가구, 설치, 영상 작업 등을 둘러보며 건축이 뻗어가는 넓은 영역을 살펴볼 수 있었다.

건축이 전통적인 의미의 집짓기에 머무르지 않고, 건축가 또한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기획자, 연구자, 운동가 등 그 업역이 다양하게 확장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크고 빠르게 지은 건축에 대응하는 느리고 작은 건축에 담긴 가치도 중요했다. 건축의 시간이 지어진 직후뿐만 아니라 짓기 전과 지은 후를 모두 포괄한다는 점도 전하고 싶었다.

지면에서 신축뿐만 아니라 인테리어 디자인, 리노베이션, 풍화를 위한 소멸의 디자인까지 다양한 건축의 방법론도 소개하고자 했다. 연재에서 다룬 건축가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실천이 가리키는 좌표가 건축의 또 다른 측면들을 자연스레 드러냈다.

건축가, 사랑에 대해 말하다

고인이 된 두 분을 제외한 나머지 13명의 건축가들과 나눈 대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대다수가 건축에 담긴 사랑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창작자라면 누구나 자기 작업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을 인터뷰와 같은 자리에서 공적으로 내뱉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합리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건축에서 그 반대인 감정의 영역은 쉽게 배제된다. 전문가에게는 부적절한 아마추어적인 태도로 취급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한 사랑은 다른 창작보다 상대적으로 긴 시간과 많은 자본, 여러 이해관계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건축의 지난한 과정 속에서 기어코 무언가를 완성하게 만드는 동력에 가까웠다. 사랑은 기획 단계에서 건축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설계의 상상력을 촉발하며, 마침내 도시 어딘가에 실제 공간을 짓게 만든다.

한동안 건축에 사랑을 붙이는 낯선 말이 나를 사로잡았을 때, 2023 베니스건축비엔날레 개막 행사에서 본 일본관 전시는 제목만으로도 눈길을 끌었다. ‘건축, 사랑받는 장소(Architecture, a place to be loved)’라는 제목의 일본관 전시는 1983년생 여성 건축가 오니시 마키가 큐레이터로 활약했다. 이 전시는 르코르뷔지에의 제자였던 건축가 요시자카 다카마사가 설계하여 1956년에 완공한 일본관 건물 자체를 전시 주제로 삼았다. 전시팀은 전시관을 살아 있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생동감 있는 여러 장치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건물의 과거 기록을 아카이빙하고, 실내에는 교류가 일어나는 워크숍 자리를 만들고, 야외에는 그늘막·앉을 자리·작은 안내판 등을 섬세하게 설치했다. 60년이 훨씬 넘은 건물의 구석구석에 개입하고 대응하는 여러 건축 행위들이 인상 깊은 전시였다.

오니시 마키는 기획의 글에서 건축을 개별 ‘생명체’(architecture as a living creature)로 간주함으로써 건축의 결함과 부족함을 포용하고, 사랑스럽게 여기고 가꿀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건물을 기능이나 성능으로 평가하는 일을 미뤄두고 건축 그 자체를 느긋하게 받아들이는 일이다. 건축을 나와의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포용적인 장소로 보는 관점이다. 건축이 생물이라면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변할 것이라는 큐레이터의 전언은 “건축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기회”가 된다.

위쪽 사진은 황지혜 작가가 설계해 2021년에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원형정원 모습. 아래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램프코어 모습. 길 위로 오르면 원형정원과 옥상정원을 만난다. 아이린 유 제공
‘미술관 공간’ 주제 작업 때
나이 든 건물 살피다 안 사실
‘건축은 돌봄과 유지가 절실’
이 또한 사랑이 작동해야 가능

돌봄과 유지를 위한 건축

연재를 이어가면서 나는 지난 4월 말에 개막한 ‘젊은 모색 2023’ 전시를 준비했다. ‘젊은 모색’은 신진 작가를 소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가장 오래된 정례 전시다. 42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청년 작가들의 실험적인 관점과 신선한 제작 방식을 실험하는 주제로 ‘미술관 공간’을 삼았다. 전시를 위해 나는 작가들의 작업 무대가 되는 미술관 구석구석을 살폈다. 미술사학자 테리 스미스의 말대로 이곳은 이제 휴머니티의 마지막 보고라 할 수 있는 공공 미술관이지만 화려하고 자극적인 엔터테인먼트 신생 공간에 위협받고 있다. 특히 내가 일하고 있는 오래된 미술관인 과천관은 큰 규모와 역사를 자랑하지만 시설이 노후화해 빠른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이렇게 나이 든 큰 건물을 살피다 보니 건축은 건축가의 손길만큼 남은 사람들이 꾸준히 행하는 돌봄과 유지가 절실한 영역임을 새삼 알게 됐다. 미술관은 전시장만 있는 순수한 화이트 큐브가 아니다. 오늘날 미술관은 작품과 작가뿐만 아니라, 관객과 비인간을 위한 장소로 다양한 대면 공간들을 포함한다. 건축이 완공되는 과정에 주로 관심 있던 내게도 건축을 돌보고 유지하기 위한 미술관 내부의 여러 실천들에 눈길이 갔다. 재개관한 어린이 미술관이나 새롭게 단장한 미술 도서실, 미술관 중심에 조성한 ‘원형정원’과 ‘옥상정원’ 등이 대표적이다. 새롭게 조성된 미술관 안의 정원에서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나무와 꽃이 새와 벌레들을 불러모았다. 관객이 접근하지 못했던 옥상은 전망대로 바뀌어 청계산 풍경을 시원하게 담아낸다. 백남준 작가의 ‘다다익선’으로 유명한 과천 미술관 중앙에 있는 램프코어는 이 두 개의 정원에 다다르기 위한 순환 동선을 만들어 낸다. 이런 미술관의 새로운 공간들은 설계자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이것이 실현되기까지 온갖 행정 부담을 감수해온 담당 공무원의 뚝심도 한몫했을 것이다. 기존의 두껍고 무거운 공간에 개입하는 이러한 관계 확장은 건축을 계속 살아 있게 만든다. 건축에 대한 사랑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발달장애 청소년 가족 프로그램 ‘어떤 감각’ 최종 작업 사진. 박희찬 작가와 미술관 에듀케이터들의 진행으로 미술관 공간 경험을 조형물로 만들었다. 아이린 유 제공
타인과 만나는 장소인 ‘건축’
돌보고 사랑하며 탐구해 갈 것

이제 이 연재를 여리고 순한 존재들이 만든 작품 이야기로 마무리할까 한다. ‘젊은 모색 2023’의 참여 작가인 건축가 박희찬과 미술관 에듀케이터들은 한 달 동안 발달장애 어린이들과 함께 과천 미술관 공간을 탐험하는 창작 워크숍을 진행했다. 아이들은 이 작업을 위해 매주 가족과 함께 조금씩 미술관에 다다르며 천천히 작업을 완성했다. 알록달록한 마블런(marble run) 장난감으로 만든 성채 같은 조형물에는 아이들의 웃음과 탄식이 담겨 있었다. 미술관에 도달하는 여러 경로와 순환하는 공간 경험을 빚어낸 이 작업을 보며 건축이 포용하는 범주는 어디까지일지 질문하게 된다. 건축이 타인과 만나는 장소임을 잊지 않고, 나 역시 돌보고 사랑하는 일에 대해 계속 탐구해 갈 예정이다. 예술가 제니 오델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에 쓴 한 문장처럼 “서로를 돌보는 방법을 다시 배우고 싶다면 장소를 돌보는 방법 또한 배워야 한다”.

■정다영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시리즈 끝>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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