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봉기는 항일구국활동이 아니다?

박임근 2023. 6. 2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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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 박민식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의 한 장면이다.

김 의원은 1894년 9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하면, 이미 인정된 1895년 을미의병 참여자의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며 모순을 지적했다.

하지만 1895년 을미의병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면서, 1894년 일본군 경복궁 점령 사건 뒤인 9월에 발생한 동학농민군 2차 봉기는 인정하지 않는 건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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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지난달 11일 오전 전북 정읍시 덕천면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 제129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열렸다. 독자 제공

[전국 프리즘] 박임근 | 호남제주데스크

“전봉준, 손화중 등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이 현재 국가유공자로 돼 있나요? 안 된 이유가 무엇인 줄 아나요?”(김성주 의원)

“아직 안 돼 있습니다. 2차 동학농민혁명은 갑오경장 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항일운동의 개념은,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통상 1905년(을사늑약) 그때부터를….”(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후보자)

지난달 22일 박민식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의 한 장면이다. 김 의원은 1894년 9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하면, 이미 인정된 1895년 을미의병 참여자의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며 모순을 지적했다.

현 독립유공자법은 적용 대상자(제4조)를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서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 또는 순국한 자”로 규정한다. 그리고 2004년 제정한 동학농민명예회복법 제2조(정의)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 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로 규정하고 있다.

두 법을 비교하면, 문제는 독립유공자법의 국권침탈 시기를 언제로 보느냐다. 1894년 7월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되고 직후인 9월 2차 동학농민혁명 봉기가 일어난다. 이어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현재 역사학계는 1905년 을사늑약 전후를 국권침탈 시기로 보고 있고, 1895년 을미의병도 독립운동으로 인정해 을미의병 참여자 145명이 1962~2022년 사이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1894년 동학 2차 봉기는 독립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전봉준 등 혁명 참여자가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다는 게 국가보훈부의 논리다. 하지만 1895년 을미의병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면서, 1894년 일본군 경복궁 점령 사건 뒤인 9월에 발생한 동학농민군 2차 봉기는 인정하지 않는 건 모순이다.

김 의원은 이날 “이런 모순을 역사학계 해석에만 맡겨둘 게 아니다. 이제 보훈부가 책임 있게 나서서 정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 후보자는 “심도 있게 연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뭔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상당한 모순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답변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0년 10월15일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에서 성일종 의원은 “교과서에 독립운동으로 기술된 동학혁명이 아직까지 독립운동으로 성격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굉장한 언밸런스(불균형)”라고 질의했다. 당시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은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저희가 정리를 해서 하여튼 추진을 분명히 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1977~2021년 사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포상 심사가 다섯차례 이뤄졌지만 단 한명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국권침탈 시기를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일어난 을미의병으로 본다는 국가보훈부의 1962년 심사 기준 때문이다.

전봉준 장군 법정심문기록(공초)에는 “다시 기포(봉기)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심문관이 묻자, “일본이 군사를 이끌고 왕궁을 습격해 임금을 놀라게 했다. 백성들이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의병을 규합해 일본인과 전투하여 이 사실을 따져 묻고자…”라고 답한다. 경복궁 습격 사건을 기화로 의병을 규합해 일제와 싸운 사실이 명확히 담겨 있다.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장은 “일제가 조선 왕궁을 점령해 고종을 포로로 잡고 협박해서 조선 군대의 무장을 해제시켜버리고 친일 내각을 세웠다. 이게 국권침탈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말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위의 두 법 개정안이 현재 발의돼 있다. 지난달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4·19혁명 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올랐다. 개정안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기대한다.

pik00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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