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덕칼럼] 老兵 이창건
원자력 대부로서 70년 삶
아직 탈원전 대못 있다며
오늘도 연단에 선다
이른 아침이어서 그랬을까? 전화기를 통해 전달되는 목소리는 힘이 없어 보였다. 혹시나 해서 건강을 물었더니 암 투병이란다. 담담하게 답한다. 올해 나이 94세. 신체의 고통이 정신세계를 망가뜨릴 나이는 지났다.
6년 전이었다. 탈원전 광풍이 몰아치던 2017년. 취재차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원자력연구소를 방문하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랑비가 흩날리던 7월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던 차 안에서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난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로 저항할 거야." 쩌렁쩌렁한 그의 말이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이창건. 우리나라 원자력은 이분을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된다. 무려 70년을 원자력에만 매달렸다. 한국전쟁 통에 그는 부산에서 도서 한 권을 구입한다. 미국 도서관 도장이 찍힌 '원자폭탄'이란 책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전쟁 직후 그는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원자력 공부에 매진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소식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귀에 들어간다. 그런 연유로 10년간 236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미국, 영국, 캐나다로 원자력 연수를 떠난다. 1인당 국민소득 70달러였던 시절. 연간 연수비는 100배나 되는 6000달러였다. 이창건은 이렇게 회고한다. "한 명의 원자력 기술자를 양성하는 데 드는 교육훈련비는 그 사람의 몸무게에 버금가는 금값"이었다고. 원자력 연구자들을 금선생이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1959년 그는 한국원자력연구원 창설멤버로 들어간다. 우리나라 첫 원자력발전소 용지를 물색하는 임무를 맡은 이창건. 지도 한 장 들고 전국을 누빈다. 그러다 찾은 곳이 경남 양산의 고리(古里). 그곳에 대한민국 원전 1호가 세워진다. 문재인 정부가 40년 됐다고 그 건재한 원전을 폐쇄조치했을 때 그는 땅을 쳤다. 원자력과 관련된 공적을 열거하자면 한 보따리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을 찾는 게 더 쉽다.
여기까지만. 지금부터는 좀 다른 얘기. 평안북도 선천 출신인 그는 해방 후 월남해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이북 출신 청년들을 모아 정보 수집과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비정규 첩보조직인 KLO(Korea Liaison Office) 부대를 창설한다. 엘리트 공대생 이창건은 이 부대 기획참모로 활약한다. 한국전쟁에 있어 KLO는 전설이다. 인천상륙작전 때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팔미도에 침투해 적을 소탕하고 등대에 불을 밝히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6인조 특공대가 결성됐다. 그중 한 명이 KLO 최규봉 대장(隊長). 화천발전소를 탈환한 파로호 전투의 승리 뒤에도 KLO가 있었다. 중공군 군관으로 위장 침투한 오죽송 대원이 그 주인공. 그들의 공을 기리는 전승비가 발전소에 설치돼 있다(사진).
군 생활 당시 그는 성사문이란 이름을 썼다. 이름조차 비밀이었던 군대. 군번도 없다. 간첩으로까지 오해받았던 이창건. 윤석열 정부가 6·25전쟁 73주년 기념행사에 그를 불렀다. 제복을 입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 옆에 앉았다. 아직까지도 생사를 알 수 없는 동료 생각에 그 자리에서 눈물의 편지를 썼다. 북에 침투해 임무를 수행하던 KLO 대원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휴전협정이었다. 그 기막히고도 안타까운 현실. 이창건은 꾹꾹 눌러 쓴 메모를 한 장관에게 전달했다.
그가 오늘 인천 해역방어사령부에서 강연을 한다. 강연 제목은 'KLO와 원자력 1세대의 삶'이란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면 마지막 강연일 듯싶어. 돌아온 답은 '천만에'다. "아직도 대못이 있어. 남은 인생 대못 빼는 데 진력할 거야." 흘러간 원전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란다. 소형 스마트원전을 말하겠다고 한다. 그렇다. 이 최첨단 원자로에도 그의 특허가 있다. 老兵은 죽지 않았다.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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