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이승만 때부터 ‘대통령제’는 왜곡되기 시작했다
[한국대통령제 100년 결정적 장면들]
한국대통령제 100년 결정적 장면들_02
왜 ‘대통령’(大統領, President)일까? 정치사에서 대통령제는 비교적 최근인 1787년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미국 건국과 함께 생겨난 새로운 정치제도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지금은 60여개국에서 순수하거나 약간 변형된 형태의 대통령제를 운용하고 있다.
‘대통령’이란 단어가 모호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제왕의 느낌을 물씬 풍겼던 것은 아니다. 240여년 전 영국과 전쟁을 치르고 독립한 미국은 영국 왕 조지3세의 전제 통치를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들은 유럽 왕정과는 완전히 다른, 시민이 지배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원했다. 이들은 로마의 공화정에 주목했다. 귀족 대표기관인 원로원을 본떠서 상원을 만들고, 로마 시민의 이익을 대변했던 민회를 본떠서 하원을 만드는 양원제를 채택했다. 여기에 더해, 로마에서 군사·행정을 총괄했던 집정관(consul)에 해당하는 행정부 수반으로, 프레지던트(president)란 직위를 만들었다.
대통령으로 번역하는 ‘프레지던트’(President)는 ‘앞에(prae) 앉다(sidere)’라는 뜻의 라틴어 ‘praesidere’에서 유래했다. 언어학자 벤 짐머는 미 공영방송(NPR) 인터뷰에서 “프레지던트는 청중의 맨 앞에 앉아서 회의를 이끌어가는 사람을 뜻했다. 15세기부터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총장 또는 학장을 프레지던트라 불렀다”고 말했다.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제헌의회 상원은 회의 주재자를 뜻하는 ‘프레지던트’가 행정부 수반을 지칭하는 단어로는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하원은 ‘폐하’ 또는 ‘각하’와 같은 수식어가 붙는 그 어떤 호칭도 행정부 수반에게 유럽 군주와 같은 막강한 권한을 주게 될까 우려했다. 3주간의 논란 끝에 상원과 하원은 행정부를 이끄는 사람을 그냥 ‘프레지던트’라 부르기로 합의했다. 민주주의 시대의 국가지도자를 일컫는 ‘프레지던트’라는 역사적인 호칭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 단어를 총통 또는 주석이 아니라 ‘대통령(大統領)’으로 번역한 건 1860년대 일본에서다. 우리도 1881년 일본에 갔던 신사유람단 보고서에 “신문을 보니 미국 대통령(국왕)이 총격을 입었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호칭과 별개로, 행정 수반인 대통령에게 얼마큼의 권한을 줄 것인지가 미 제헌의회의 또 다른 논쟁거리였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대통령이 유럽의 왕에 좀 더 가깝게 되길 원했다. 반면에 제임스 매디슨은 의회 지배를 받는, 총리에 가까운 대통령을 염두에 뒀다. 이런 대립은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을 매우 모호하게 만들었다.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을 때 누구도 그에게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고 제러미 수리 텍사스대 정치학 교수는 <불가능한 대통령제(The impossible presidency)>에서 지적했다.
로마는 2명의 집정관을 뒀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로마 공화정을 동경했던 미 제헌의회가 어쩌면 왕과 같은 권한을 갖게 될지 모를 행정부 수반을 단 한 사람만 두기로 한 건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과 관련이 있다. 필라델피아 제헌의회가 막을 내린 뒤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표인 피어스 버틀러는 “다수의 대표가 (미국 독립전쟁을 이끈) 조지 워싱턴 장군을 대통령으로 염두에 두었기에, 그의 미덕에 맞추어 대통령 권한을 상정했고 그래서 대통령 권한이 좀 더 강력해졌다”고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조지 워싱턴은 ‘건국 대통령’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헌법이 아닌 자신의 행동이 대통령이란 자리의 책임과 권한을 규정할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1789년 4월30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뒤 제임스 매디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모든 것의 처음으로서 현재 상황에서 선례를 세우기 위해 봉사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원하는 바는 이런 선례들이 진정한 원칙들 위에 서는 것이다”라고 썼다. 지지자들의 강력한 요청에도 세 번째 대통령선거 출마를 거절한 것이나, 퇴임 이후에도 어수선한 국가의 통합을 위해 애쓴 것은 그런 차원이었다.
그 점에서 윤석열 정부가 ‘건국 대통령’으로 추앙하려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행적엔 짙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에 대통령제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이 남긴 긍정적인 레거시를 1948년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에선 찾기 어렵다. 워싱턴은 종신 집권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대통령직을 제어하기 위해 스스로 세 번째 임기 도전을 거부했다. 이승만은 대통령을 두 번까지만 연임할 수 있도록 한 헌법을 무리하게 개정했다. 국회에서 헌법 개정안이 한표 차로 부결됐는데도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을 적용해 가결됐다고 선포했다. 그의 장기집권 꿈은 유혈 사태를 부른 부정선거로까지 이어졌다. 한국 대통령제는 왕이 되려는 욕망 탓에 처음부터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승만은 또 대통령제의 핵심인 ‘견제와 균형’ 원칙을 망각했다. 정부 수립 직후부터 대통령과 국회는 날카로운 대립 속으로 빠져들었다.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을 앞두고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채택한 정치형태 초안은 의원내각제였다. 국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에겐 상징적 권한만 주고, 실질적인 행정부 운영은 국회 다수당 대표가 겸하는 국무총리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여기엔 대중의 지지가 높은 이승만에게 형식적인 대통령 자리를 주고, 총리직은 한민당이 가지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미국엔 없는 국무회의라는 제도를 만든 것도, 총리가 국무회의를 주재해서 행정 부처를 지휘하게 하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 임기 동안은 정부가 안정된 상태에 있어야 하고, 국회가 이것을 변경할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다. 대통령제가 아니면 자신은 그 어떤 직위도 맡지 않고 민간에 남아 국민운동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의원내각제로는 정부수립 초기의 혼란을 막기 어렵다는 이승만의 주장은 국회의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제헌 국회는 1948년 7월17일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통과시켰고, 이승만은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통령제는 이렇게 한국 정치에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대통령 권한과 행정부·입법부 관계에서 모호한 구석이 적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잘못된 유산 중 하나는 입법부를 무시하고 국회를 대통령 아래로 위치 지은 점이다. 정부 수립 초기라 대통령과 국회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원칙적인 헌법 조항 외엔 명확한 규정이나 컨센서스가 없었다. 조지 워싱턴이 그랬듯이 그 빈칸을 채우고 새로운 전통을 만들 책임은 초대 대통령에게 있었다.
이승만은 국회를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는 기구로 인식했고, 국회를 경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견이 있을 때 국회와 ‘타협’하기보다 ‘굴복’을 요구했다. 단적인 사례가 반민족행위처벌법 논란이었다. 친일파 처벌을 위한 이 법은 1948년 9월 국회에서 압도적 지지로 통과됐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 부닥쳤다. 이 대통령은 법안에 서명하고 공포하긴 했으나 “지금은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離散)시킬 때가 아니다” “정권 이양 시기이므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며 공공연히 반대했다. 국회는 분열됐다. 3차에 걸친 법 개정 끝에 반민족행위처벌법은 결국 형해화 했다. 이 법에 근거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비극적인 해체의 길을 걸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의견을 존중하면서 행정부와 입법부 갈등을 풀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점에서 “의회 요구를 존중하는 게 통합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던 조지 워싱턴과 달랐다. 서희경 박사(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는 <대한민국 건국기의 정부형태와 운영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정부 수립 초기에 국회는 주요한 국무에서 거의 배제됐다. 이승만 정부가 국회 건의를 거듭 거부했기에 윤재욱 제헌 국회의원은 ‘국회가 일종의 정부 참고기관이나 대통령 자문기관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발언을 할 정도였다. 특히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과 행정권 이양 과정을 거치면서 국회에 대한 정부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어떤 의미에선 국회의원들 역시 그런 정치 현실을 점점 수용하는 쪽으로 변해갔다.”
이승만 정부 이후로 대통령이 국회와 정당을 경시하는 풍조는 지금까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요즘 국민의힘이 초선·중진 가릴 거 없이 대통령에게 꼼짝 못 하는 데엔 이런 오랜 역사적 경험이 디앤에이(DNA)에 새겨진 것도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박찬수I 대기자
한겨레신문사에서 워싱턴특파원과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와 국회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 한국 진보운동의 과제를 담은 <진보를 찾습니다>(2021년)를 펴냈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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