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의 포스트모더니티, ‘피프티 피프티’라는 문화현상
21세기 케이팝 산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무엇일까. 대체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뉴욕 타임스퀘어에 울려 퍼지던 순간, 방탄소년단(BTS)이 ‘Dynamite’로 빌보드 메인 차트 1위를 거머쥐던 날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2023년에 이르러 규모는 작지만 그에 못지않은 상징성을 지닌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피프티 피프티(FIFTY FIFTY)의 빌보드 차트 침공이다.
그들의 소박한 배경은 놀라움을 더욱 증폭시킨다. 지난해 11월 18일 데뷔한 피프티 피프티는 가요계에 출사표를 내민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인이다. 그들을 프로듀싱한 어트랙트 역시 2021년에 설립된 신생 기획사로, 규모나 역사 면에서 중소도 아닌 초소형 기획사에 가깝다. BTS와 블랙핑크처럼 세계적 팬덤과 압도적인 자금력은 커녕 국내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그들이 대체 어떻게 전 세계 거대 자본이 집결하는 미국 음악 산업의 주류에 진출할 수 있었을까.
"마케팅 전략?" 절반만 맞아
피프티 피프티의 성공 역시 틱톡의 영향이 주효했다. 한 틱톡 유저가 '큐피드’의 프리코러스와 함께 간단한 손동작 안무를 선보이는 영상이 도화선이 됐다. 틱톡에서의 트렌드는 자연스럽게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로까지 전염됐고, 그 결과 자국에서도 무명에 가까운 신인 걸그룹이 빌보드 차트 최상단에 도달하는 경이로운 일이 벌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언론은 큐피드를 숏폼 문화를 영리하게 활용한 마케팅의 승리로 분석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의 흥행 구조에서 숏폼 문화가 작동한 방향을 거꾸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숏폼이 피프티 피프티를 활용한 것이지 피프티 피프티가 숏폼을 활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내에 챌린지 열풍을 점화한 지코의 '아무노래’를 비롯한 대다수의 틱톡 히트곡들은 숏폼에 최적화된 구간을 음악 내에 배치하고 아티스트가 직접 캐치한 포인트 안무를 제작해 영상을 업로드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처럼 기존 틱톡 마케팅의 방식은 아티스트가 자신의 음악을 향유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 대중이 그 방식에 따라 콘텐츠를 재생산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하향적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큐피드의 흥행 구조는 상향적이다. 익명의 유저로부터 창조된 챌린지가 아티스트 본인에게 역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피프티 피프티 역시 자체적으로 틱톡 챌린지를 제시한 바 있지만 프리코러스에 초점을 맞춘 팬메이드 챌린지와 달리 후렴 파트를 배경으로 하는 등 세부 사항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차이는 팬메이드 챌린지에서 사용된 큐피드가 원본이 아닌 '스페드업(Sped-Up, 인위적으로 배속을 가해 원곡보다 템포가 빨라지게 수정한 2차 창작물)’ 버전이라는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섹션을 노출해 인상을 각인시켜야 하는 숏폼 비디오의 특성상 음악의 템포가 빠를수록 유리한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원곡의 BPM을 130~150% 가량 높이는 스페드업 기법이 태동하게 되었다.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을 원곡자가 아닌 소비자가 결정하고 보편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 음악 자체까지도 임의로 변형하고 분절시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에 내포된 무한한 역동성을 온전히 구현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절대적인 권위를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자의 탄생을 위해서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문장으로 표현했다. 사회 구성원을 도구적 이성으로 획일화시키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인간 개성의 실현을 방해하듯, 예술 작품의 해석을 단일한 방향으로 수렴시키는 저자의 권력은 독자와 작품 간의 열린 소통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피프티 피프티 현상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저자의 죽음’이 실현된, 대중문화 속 포스트모더니티의 현현이라 할 수 있다. 음악의 수용에 있어서 원작자가 독점하던 절대적 권한은 해체되며, 이제 대중은 작품의 소비 방식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에까지 개입한다.
아래로부터의 음악이 뒤흔드는 산업구조
하지만 앞서 소개한 틱톡과 유튜브를 비롯한 소비자 중심 플랫폼은 이 유리천장을 서서히 붕괴시키고 있다. 큐피드의 빌보드 성적 세부 집계를 보면, 비슷한 순위의 곡들에 비해 라디오 점수는 거의 전무하지만 스트리밍과 세일즈 수치가 압도적으로 높아 총합 점수에서 밀리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자본 권력의 지배력에 대한 대중의 저항력을 명확하게 증명해 보이는 사례다. 이에 더해 미국에서의 흥행을 토대로 피프티 피프티의 인기가 한국에 역수입되는 현상 역시 국내 음악 유통 산업의 폐쇄적 기득 구조를 허물고 내수 시장에 역동성을 투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다분히 상징적이다. 물론 틱톡을 비롯한 주류 플랫폼 역시 거대 자본의 영향권 아래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기에 이들이 대중음악의 완전한 민주화를 실현해 줄 거라고 믿는 것은 또 다른 허상적 권위를 낳을 뿐이다. 허나 숏폼 문화의 방법론은 대중이 음악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하여 작품의 새로운 가치를 주체적으로 창출하고 음악 산업의 구조적 불평등을 부분적으로 돌파하는 가능성을 입증해 냈다는 점에서 분명히 유의미하다. 특히 한국어 가사 탓에 라디오 중심의 미국 음악 시장에서 구조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케이팝 아티스트들에게 이 성과는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티의 물결은 케이팝과 세계 음악 산업의 모든 것을 명백하게 다른 지점으로 데려가고 있다. 폐쇄적 공급 구조에 철저하게 귀속되어 하향적으로 지정된 음악만을 소비하던 대중은 이제 없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음악 산업의 헤게모니가 창출하던 폭력적 총체성이 붕괴되고, 그 빈자리에는 다양성이라는 새 시대의 포스트모더니티가 강림한다. 피프티 피프티의 등장은 어쩌면 그 변화의 역사적인 시발점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목격한 것이 거대한 혁명의 단초일지, 혹은 한때의 유행에 불과할지는 오로지 시간만이 알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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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어트랙트
정나리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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