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전쟁터서 ‘100회 출격’ 공군 장군… 포로들 돌본 美 사제 [심층기획-한·미동맹 70주년]

박수찬 2023. 6. 27.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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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한·미 영웅들… 대한민국은 기억합니다
② 숨은 전쟁 영웅들
서울 탈환 ‘태극기 게양’ 박정모 대령
최전선 지킨 숨은 주역인 갑종장교들
단독으로 北 기관총 진지 파괴 美 상병
이들의 용기와 희생 영원히 기억해야
6·25전쟁이 벌어진 3년여 동안 한국군과 유엔군 깃발 아래 수많은 장병이 압록강부터 낙동강에 이르는 한반도 전역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전선에서 물러서지 않은 채 적과 맞선 군인, 동료의 안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군인, 힘든 처지에 놓인 동료를 돌봤던 군인…. 이들의 용기와 투혼 덕분에 한국은 오늘날의 번영을 이뤘다. 자유를 위해 희생한 영웅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첫 100회 출격·중앙청 태극기 게양

6·25전쟁 당시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을 달성한 김두만(96) 전 공군참모총장은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린다. 1949년 공군에 입대한 그는 L-5 연락기로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 전쟁 발발 사흘째인 6월27일 짧은 비행 훈련을 받은 뒤 T-6 훈련기로 출격, 북한군을 폭격했다. 이후 기종 전환 교육을 받고 미국이 지원한 F-51 전투기를 조종했다. 1952년 1월11일 금강산 일대 북한군 보급로 공습으로 한국 공군 첫 100회 출격 기록을 남겼다.

휴전 직후인 1958년 공군 10전투비행단장 시절에는 영외자들의 궁핍한 생활을 개선하고자 기지 활주로 서쪽 공터를 논으로 조성해 장병들과 함께 모내기를 했다. 1970년 11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후 88세이던 2015년 국산 FA-50 경공격기를 타고 후배 조종사와 비행했다. 국가보훈부와 한미연합사령부가 4월 선정한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에 포함됐다.

김 전 총장과 더불어 10대 영웅에 뽑힌 박정모 해병대 대령은 1950년 1월 해병대 간부후보생 1기로 임관했다. 1950년 9월27일 서울 수복 작전에서 중앙청 돌입 당시 그는 옥상으로 가는 사다리가 부러진 것을 발견했다. 이에 부대원들의 허리끈으로 사다리를 고친 뒤 옥상에 진입해 이등병조 양병수씨, 견습수병 최국방·정영검씨 등과 함께 태극기를 게양했다. 정부는 공훈을 인정해 을지·충무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2010년 85세로 타계했다.

가수 진미령씨의 부친 김동석 대령도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에 선정됐다. 1950년 7월 육군 17연대 11중대장으로 경북 상주 인근에서 벌어진 북한군 15사단 45연대와의 화령장 전투에서 적군을 궤멸시켰다. 1950년 9월 미 8군 정보연락장교로 파견된 그는 서울 탈환작전을 위한 첩보 업무를 맡았다. 매사에 성실했던 그가 수집한 핵심 정보는 맥아더 원수에게 직접 전달돼 서울 탈환과 북진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02년 미 행정부는 김 대령의 공적을 인정해 전쟁 영웅 칭호를 부여했다. 2009년 85세로 별세했다.

6·25전쟁의 숨은 주역인 갑종장교들도 빼놓을 수 없다. 1950∼1969년 육군보병학교 갑종간부후보생 과정을 이수하고 임관한 4만5000여명이 그들이다. 6·25전쟁에 참전한 국군 장교 3만3000여명 중 갑종장교 출신이 1만550명으로 전체의 32%에 달했다. 이들은 대부분 최전선에서 싸웠고 805명이 산화했다. 백마고지 전투(1951년 10월)에서 활약한 강승우 중위, 김화지구 전투(1953년 6월)에서 싸운 김광수 대위 등이 대표적이다.
◆포로 돌보며 헌신한 카폰 신부

한국을 지키고자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들도 국가와 동료를 위해 헌신했다. 포로수용소에서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돌보다 숨진 에밀 조지프 카폰 미국 군종신부는 ‘6·25전쟁의 예수’라 불리는 인물이다. 1916년 4월 미 캔자스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카폰 신부는 1940년 사제 서품을 받고 1950년 7월 군종신부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1기병사단 8기병연대 3대대에 속한 그는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격했지만, 소속 부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되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부상자를 제외한 군인들은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카폰 신부는 생포될 것을 알면서도 부상자들과 함께 남았다. 포로로 잡힌 후에는 아군을 처형하려는 적군에 용감하게 맞섰다. 평북 벽동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있으면서 부상자를 간호하고 음식을 나눠 줬다. 그러나 고된 수감 생활과 혹독한 추위, 질병 등으로 1951년 5월23일 수용소에서 숨졌다. 유해는 2021년 3월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이 유전자(DNA) 대조를 통해 하와이 국립묘지에 있는 신원 미상 참전용사 유해 중에서 찾아냈다. 이후 같은 해 9월 캔자스주 위치토의 성당에 안장됐다. 미 정부는 2013년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 한국 정부는 2021년 태극무공훈장을 각각 추서했다.

카폰 신부처럼 1기병사단 8기병연대에 속했던 에두아르도 코랄 고메즈 병장(당시 계급)은 6·25전쟁의 분수령 중 하나였던 다부동 전투에서 활약했다. 1950년 9월3일 고메즈 병장의 중대는 북한군 전차 1대와 다수의 기관총 공격을 받았다. 고메즈 병장은 피격될 위험을 무릅쓰고 약 30m를 기어가 전차에 올라탄 뒤 해치를 열어 수류탄을 던졌다. 이 과정에서 부상을 당했으나 후송을 거부한 채 기관총을 품에 안고 북한군을 향해 쉴 새 없이 쐈다. 총이 과열되면서 손에 화상을 입었고 다친 상처에서 피가 흘렀지만, 중대가 방어 태세를 갖출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끝까지 싸웠다. 미 정부는 2014년 명예훈장을 추서했다.

미 2사단 23연대 소속 빅터 에스피노자 상병(당시 계급)은 1952년 8월1일 철원 전투에서 활약했다. 그가 속한 부대는 고지를 공격하려 이동하다 적의 집중 포격을 받았다. 그는 쏟아지는 포화를 뚫고 단독으로 소총과 수류탄 공격을 감행, 기관총 진지를 파괴했다. 이후에도 돌격을 거듭하며 박격포 진지와 벙커를 부쉈고, 탄약이 바닥나자 중국산 수류탄과 TNT로 싸웠다. 이를 통해 적군 14명을 사살하고 1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미 정부는 2014년 명예훈장을 추서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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