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의 미래 사피엔스] [32] 과거를 왜곡할 수 있는 시대
미국 SF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책 ‘화씨 451′에서는 소방관이 책을 불태워야 하는 디스토피아 미래 사회를 보여준다. 화씨 451도, 그러니까 섭씨 233도는 종이가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다. 책은 기록이고, 기록은 지식이다. 지식은 언제나 새로운 질문을 추구하기에, 한순간의 쾌락과 만족을 추구하는 대부분 사람에게 책은 위협적이다. 이 때문에 모든 책은 금지되었고, 이제 불을 끄는 게 아닌, 불을 지르는 것이 소방관의 업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권력 유지와 국민 선동을 위해 과거를 조작하는 ‘빅브러더’ 정권은 수시로 과거 기록과 방송 내용을 변경한다. 얼마 전까지 같은 편이었던 국가는 오랜 원수로 탈바꿈하고, 여러 번 전쟁을 치른 상대 국가는 갑자기 연합국가로 변종된다. 더구나 기존 언어를 개량한 ‘신어(Newspeak)’ 덕분에 개인의 자유와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조차 사라져버린다.
현재의 욕구와 정치적 선동을 위해 과거가 수시로 왜곡될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미래에 대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아날로그 현실에서 과거 기록을 완벽하게 왜곡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화씨 451에서 소방관들은 남아있는 책을 계속 찾아야 하고, 1984년 빅브러더 정권은 이단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고문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모든 기록이 디지털화된 미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래 생성 인공지능 GPT-10, GPT-11, GPT-12로 무장한 독재국가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기존 기록을 새로운 ‘과거’ 기록으로 대체할 수 있다. 2023년 신문 기사는 멀지 않은 미래에 언제든지 수정되고 왜곡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1985년 영화 ‘나머지 시간에 대한 현재의 공격’에서 독일 감독 알렉산더 클루게는 미디어와 기록에 따라 변하는 인간의 기억을 보여준다. 과거를 최대한 보존하고 기억하려던 시대를 넘어, 과거를 언제든지 ‘업데이트’할 수 있는 역사 2.0 시대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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