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심층적응의 정치’가 필요하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구조적 친화성을 감안해도
국가와 정치는
사회 붕괴를 막아내기 위해
역할을 더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붕괴의 불가피성을
오히려 출발점으로 삼아
기후 활동 범위를 확장하는
심층적응 전략이 필요
가령 붕괴는
종말을 막아낼 새 선택의
시작일 수 있음을 알리고
생각이 다른 이들과의
타협을 이끌어 내야 한다
이것을 수행할 주체 생성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사회의 붕괴와 문명의 종말을 예견하는 이들이 있다. 종전에는 강한 부정과 냉소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부분 혹은 변형적 수용의 대상이다. 주로 기후변화의 치명적 위협을 추적하고 경고하는 연구자·활동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2020년 말 60명이 넘는 기후학자를 포함해 30개국 450명 이상의 과학자가 붕괴 위험을 경고하는 서한에 서명을 하기도 했다(http://www.scholarswarning.net). 이들을 부정과 냉소, 부분 혹은 변형적 수용의 대상으로 간주한 주(도)체는 일군의 정부, 기업, 주류 언론 등이었다. 이들에 동조하는 개인과 집단도 있다.
정부와 기업과 주류 언론의 입장과 태도는 애초 기후변화의 위험성은 과장된 것이라고 부인했던 것에서, 위험하지만 관리·통제가 가능하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최근에는 심각성에 대한 인정의 강도를 높이고 있기도 하다. 가령 유엔과 유럽의회, 그리고 영국 정부 등은 2019~2020년에 걸쳐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했고, 한국도 2020년에는 국회가 비상선언을 하고 2021년에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 법은 지난해부터 시행 중이다. 기업들은 ESG 경영을 내세우며 지속 가능한 발전에 나서고 있으며, 언론은 기후변화 관련 보도와 기사를 활성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수상자(이바르 예베르·1973년 물리학상)를 비롯해 기후비상사태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들은 기후위기론이 부적절한 모델에 기초해 과학적이지 않고 통계적으로도 증거가 없으며 경제적 현실을 고려치 않는다는 것을 부정의 이유로 내세운다. 이들 중에는 한국의 환경공학자도 포함돼 있는데, 그는 최근 국내에서도 점차 활발해지고 있는 기후정의운동과 대규모 집회 개최 등에 대해 ‘광우병 사태와 비슷한 기후 선동’이라며,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2023년 상반기가 마무리되는 6월 현재, 기온·수온·해빙·이산화탄소 등 4대 환경지표가 최악에 이르고 있다는 관측결과가 나왔다. 유럽연합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서비스’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6월 중 전 세계 기온이 산업화 이전 수준을 1.5도 이상 초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 해양대기청에 따르면 지난 5월은 전 세계 해양 수온 기록상 가장 더운 달이었다. 콜로라도-볼더 대학의 빙하학자 테드 스캠보스는 올 2월 말 남극 해빙 면적이 1970년대 기록을 시작한 이래 가장 적은 69만1000mi²로 줄었고, 특히 하락 추세가 가파르다고 보고했다.
미국 국립해양대기국과 UC샌디에이고 대학의 해양학자들은 대기 중 이산화탄소 수치가 지난 5월 424PPM으로 최고치였는데, 이는 수백만년 동안 볼 수 없었던 현상으로 탄소 오염 수준이 산업화 이전보다 50% 이상 높아졌다며 성명서까지 냈다. 해양과 대기 온도 상승과 관련한 자료를 일상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경제적 현실 고려’ 주문은 무리
이런 최근의 상황을 보면 지속적 ‘관찰’에 충실한 학자와 기관들의 활동을 비과학적이거나 정치적이라고 몰아세울 것은 아닌 것 같다. 또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라는 주문은 무리가 아닌가 싶다. 그건 대놓고 이해관계에 따르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델을 적용하라는 ‘학계 정치’의 강요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경제적 이해관계와 과학계의 보수성 등을 감안할 때 기후위기론에 대해, 특히 그것이 사회의 붕괴와 문명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경제적 이해관계와 학계의 보수성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들마저 무관심 등에 기대어 기후위기론을 (적극) 수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령 기성세대가 미래세대의 몫을 끌어당겨 남용하면서 소진시키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 말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크게 두 가지 층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개인의 심리적 층위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정치적 층위다. 개인은 심리적으로 급격하고 거대한 변동에 수세적일 수밖에 없다. 왜 하필 자기가 살아가고 있을 때, 또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런 변동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설사 이해한다고 해도 불가항력이라고 느끼며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쉽고 편하게 빠져드는 심리 상태가 ‘알고 싶지 않은 마음’과 설마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라는 ‘주관적-부정적 예측에의 의존’이다. 두려움에 절망하기도 싫고, 끝이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과 달리 붕괴와 종말을 믿고 설파하는 이들을 미워하고 불신하게 된다. 그 과정의 역도 마찬가지다. 과도한 신념에 가득 차, 그래서 때때로 과장된 언동으로, 타인을 다그치며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그들의 주장을 멀리하는 게 자신의 평온을 유지하는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론의 ‘과잉 수용’ 역시 두려움의 소산이다. 철석같이 믿어 남들도 하루빨리 자기처럼 만들지 못하면 붕괴와 종말을 맞이하는 벌을 받게 될 거라는 공포에 갇혀 있는 것이다.
사회·정치적으로는 사람들을 개인이라는 이름으로 방치해 거대 변화가 가하는 부담감을 홀로 감당하게 만드는 문화적 풍토(가치관과 행동규범 등) 때문이다. ‘무한경쟁’ ‘적자생존’ ‘약육강식’ ‘승자독식’ 같은 특정 시대의 게임 규칙을 문명세계의 보편적 원리로 격상시킨 근간의 사회 질서가 딱 그 꼴이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해 붕괴와 종말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그래서 실제 붕괴와 종말의 위험이 커졌다면 그만큼 더 빠르고 강하게 성장해야 한다는 근대 문명의 제한적 사유(물질주의적 진보사관)가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한층 더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사회의 문화적 풍토와 이념 지형을 공인하고 유지·재생산하는 정치 때문이다.
탄소 감축 목표 실현에 의구심
이때 중요한 것은 정치가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할 때조차 그 사태를 낳은 기존의 낡은 사회 질서와 그 작동 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가령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것은 위기의 강도를 낮추는 것일 뿐 위기를 막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현실은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목표조차 실현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JP모건은 이런 상황을 에너지 시장 투자와 관련한 내부 보고서(‘Report on the economic risks of human-caused global heating’)를 통해 정확히 예견했다. “파리협정의 지구 평균온도 2도 상승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 세계 석탄화력발전 설비의 34%를 즉각 배제할 필요가 있다. (…) 그러나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영국 가디언은 이를 ‘JP모건의 경제전문가가 인류를 위협하는 기후위기 경고’라는 제목으로 해석해 기사화했다.
붕괴는 영국 컴브리아 대학의 교수이자 기후혼돈 전문가인 젬 벤델의 말처럼 “시스템이 포괄적으로 그리고 그전의 모습으로 돌이킬 수 없도록 파괴된 형태”를 가리킨다. 붙들고 있어봐야 그건 파편 조각, 부스러기에 불과하다. 그걸 쥐고 있는 한 문명의 종말을 막기는 어렵다. 현대 국가와 정치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구조적 친화성을 감안한다 해도, 국가와 정치는 붕괴를 막아내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후변화가 폭주 양상을 보이는 현재 상황에서는 젬 벤델의 제안처럼 붕괴의 불가피성을 오히려 출발점으로 삼아 기후적응 활동의 범위를 확장하는 ‘심층적응(deep adaptation)’ 전략이 필요하다.
가령 붕괴는 오로지 절망만을 강제하는 게 아니라, 종말을 막아낼 새로운 선택의 시작일 수 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리고 잊혀진 탈물질적 가치와 타인과의 관계성 ‘회복’, 편리하지만 불필요한 상품 개발 및 소비 자산에 대한 과도한 사적 소유 욕망의 ‘포기’, 비전기(非電機) 놀이와 계절 식단 등의 ‘복원’, 혼돈스러운 현실과 처지와 생각이 다른 이들과의 ‘타협’을 이끌어 내야 한다. 이런 정치를 수행할 주체와 세력의 생성 및 등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하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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