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촌동 전세사기 추적①] 지옥이 된 자취방…"집에만 들어오면 울어요"

김세정, 황지향 2023. 6. 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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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 H하우스 신탁전세사기 사건
어느날 갑자기 '무단 점유자' 신분 전락
청년피해자들 "보증금 잃고 쫓겨날 위기"

서울 강서구에서도 또다시 전세사기 사건이 타졌다. 확인된 피해자만 5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해당 건물에 거주 중인 전세사기 피해자의 방. /김세정 기자

전세사기가 청년을 울린다. 인천 미추홀구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전세사기 사건이 터지고 있다. <더팩트>가 찾은 곳은 서울 강서구 등촌동. 뜻밖의 재앙을 당한 피해자 청년들은 막막할 뿐이다. 2회에 걸쳐 '서울 강서구 H하우스 사건'을 들여다본다. <편집자주>

[더팩트ㅣ김세정 기자·황지향 인턴기자] 방안을 비추는 햇살은 따스했다. 창문을 열고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면 서울 생활이 모두 다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좋은 공간이란 내가 평온해지는 곳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아늑함도 오래가지 않았다. 4명의 청년에게 어느새 방은 지옥으로 변했다.

혜빈과 연경, 승호, 재희(모두 가명) 26세 동갑내기들에겐 나이 외 공통점이 있다. 같은 건물에 산다는 것. 그리고 똑같이 전세사기를 당했다는 것.

혜빈 씨는 고시생이다. 인터넷 강의보다는 직접 노량진에 가서 현장강의를 듣고 싶어 홀로 서울에 올라왔다. 지하철로 노량진 학원을 바로 갈 수 있는 동네를 찾다 보니 이곳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철역에서도 가깝고, 가격도 적당했다. 혜빈 씨의 어머니는 보증금 3000만원을 마련해줬다. 속 깊은 딸은 엄마가 돈을 어떻게 모았는지 잘 알았다. 인주를 듬뿍 묻힌 도장과 함께 '꼭 합격하겠다'는 다짐도 계약서에 눌러 찍었다.

연경 씨는 취업을 목표로 상경했다. 아버지가 귀한 외동딸을 위해 마련해준 5000만원으로 반전세 계약을 했다. 확정일자를 받던 날 주민센터 직원은 "5000만원이면 국가에서도 보장해준다"며 안심시켰다. 집을 잘 구한 덕일까. 원하던 직장도 구했다. 사회생활 첫발은 순조로웠다.

승호 씨와 재희 씨는 새내기 직장인이다. 승호 씨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 취업문에 지쳐갈 때쯤 한 회사에서 "2주 뒤 바로 출근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회사 근처 자취방을 찾아다니던 승호 씨는 부모가 마련해준 7000만원으로 서둘러 이곳을 계약했다. 재희 씨도 그렇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 1000만원과 아버지 돈 3000만원으로 계약서에 사인했다. 방에 누워있으면 '발품 판 보람이 있구나'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 4월 H하우스는 압류당했다. B사는 H하우스를 급기야 공매로 넘겼다. /김세정 기자

4명의 사회초년생은 서울 강서구 H하우스에 살고 있다. 이곳 생활에 나름 만족했다. '전세사기'를 알리는 쪽지를 발견하기 전까진.

"저희가 살고 있는 건물은 신탁부동산 위탁자의 전세사기, 계약사기로 강서경찰서에서 수사 중이며 건물 또한 공매가 진행 중입니다. 명도소송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피해임차인 합동으로 민·형사상 법적 대응을 추진하고자 하오니 연락주세요."

전세사기는 뉴스에서나 봤다. 내 일이 되리라고 상상 못 했다. 신탁과 공매, 명도소송은 무엇이며 경찰 수사에 민형사 대응이라니.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H하우스는 총 4개의 동이 있다. 임대인 A씨가 대표인 법인은 3개 동을 사들였다.

은행 대출에는 담보가 있어야 한다. 보통 재산에 근저당을 설정하는데 은행은 돈을 찾지 못하면 부동산을 경매로 넘겨 회수한다. 신탁은 '믿고 맡긴다'는 의미 그대로 신탁회사에 부동산 소유권을 위탁해 돈을 빌리는 방식이다. 은행은 자금 회수가 어려워지면 신탁회사가 가진 소유권을 처분한다. 경매가 아닌 공매 방식을 거치는데 절차가 간편하고, 시간이나 비용도 적게 든다. 은행도 복잡한 근저당보다는 신탁을 선호하는 편이다.

임대인 A씨도 신탁을 선택했다. 2021년 8월 3개 동 등기부등본에 법인 이름을 올린 A씨는 같은 해 9월7일 부동산 소유권을 신탁회사인 B사에 넘겼다. 이 과정에서 9개 은행에서 147억원가량을 빌렸다. H하우스의 실질적 소유권은 A씨가 아닌 B사가 갖게 됐다.

계약 전 임차인은 부동산 신탁 여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신탁등기가 돼 있다면 등기부등본뿐 아니라 신탁원부라는 서류를 확인해야 한다. 신탁등기 된 부동산을 계약하려면 신탁회사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신탁원부에는 이같은 특약사향이 있다. H하우스 신탁원부에는 '임대차계약은 위탁자(A씨)가 우선수익자의 서면동의를 첨부해 수탁자(B사)에게 요청할 경우 위탁자, 수탁자, 임차인 간에 체결하거나 수탁자가 별도의 임대차 동의서를 교부하기로 한다'고 나와 있다. 계약을 체결할 땐 B사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세금이 체납되면서 지난 4월3일 H하우스는 압류당했다. 급기야 공매에 넘어갔다. 피해자들은 보증금도 잃고,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김세정 기자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임차인들은 계약할 때 신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물론 동의서를 받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청년들은 "괜찮다" "문제없다"는 말만 믿었다. 후에 H하우스 관리소장에 동의서를 요구했지만 "기다려 달라"는 말만 들다고 한다. 청년들 중 일부는 계약 당시 신탁원부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계약을 진행했던 공인중개사사무소 측은 "신탁원부를 누락하고는 계약 진행이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금리 인상의 여파는 H하우스에도 찾아왔다. 세 모녀 전세사기와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같이 전세 사고가 연이어 터지며 A씨도 점점 어려운 상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H하우스는 압류당했다. B사는 H하우스를 급기야 공매로 넘겼다. 효력 없는 계약으로 임차권을 인정받지 못한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4명의 청년은 사실상 '무단 점유자' 신분으로 전락했다. 여기까지가 사건의 자초지종이다.

H하우스 3개 동 245세대 중 신탁계약 이후 입주한 세대는 약 95세대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만 50명이 넘는다. 대부분 2030 사회초년생이다. 보증금은커녕 갈 곳도 사라졌다. 석 달 전부터 관리비 납입 계좌를 바꿔 달라는 A씨의 요청에 따라 A씨 개인계좌로 관리비를 보냈지만, 이것까지 미납되면서 전기와 수도도 끊길 위기다.

혜빈 씨는 지난달 경찰서에 나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처음엔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다. 3200만원까지 보증금은 무조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최우선 변제금' 제도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계약 효력이 없는 신탁사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퇴거 명령을 받으면 본가로 내려가야죠. 집에만 들어오면 울어요. 학원 마치고 집에 가려고 노량진에서 지하철타면 그때부터 우울해요. 정말 좋아했던 집이거든요. 위치도 좋고, 햇볕도 잘 들어서 애정이 많았어요. 한순간 기억이 망가져 버린 거죠. 시험이 이제 반년도 안 남았는데 힘들어요. 정신적, 경제적 손해를 많이 봤어요."(혜빈)

관리비까지 미납되면서 수도와 전기도 끊길 위기다. /김세정 기자

꿈을 안고 상경한 청년들은 피같은 돈을 잃고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 한 채 짐을 싸야 할 신세다.

"2주 전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단체 권고사직이 있어서 직장도 잃고, 이 사건까지 터진 거예요. 다시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지금은 할 수가 없어요."(연경)

"올해 1월에 들어왔는데 이런 일을 당한 거죠. 동의서를 왜 안 주냐니까 '우편함에 넣어준다'고 하길래 기다렸죠."(승호)

"직장에서도 안 좋은 일이 있던 찰나에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 터진 거예요. 집 잘 구했다고 자랑도 했는데 지금은 어디 가서 말도 못 해요."(재희)

sejungki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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