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 작가 키우는 영국 내셔널갤러리의 전략[영감 한 스푼]

김민 문화부 기자 2023. 6. 26.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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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자국 미술사 정립의 중요성
존 컨스터블, ‘스트랫퍼드의 종이공장’, 1820년, 캔버스에 유화, 127x182.9cm.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민 문화부 기자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의 개막을 맞아 1일 한국을 찾은 크리스틴 라이딩 내셔널갤러리 학예실장은 ‘전시작품 중 좋아하는 작품을 꼽아 달라’는 질문에 난처한 듯 웃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시에 나온 작품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굳이 하나를 꼽자면… 제가 개인적으로는 영국 미술 전문가이기 때문에 영국 작가 작품에 애정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존 컨스터블(1776∼1837)의 ‘스트랫퍼드의 종이공장’이 아무래도 애착이 가는 작품입니다.”

라파엘로, 카라바조, 마네 등의 대가를 제치고 컨스터블을 꼽은 그의 답변은 국가 미술 기관의 관리자로서 당연한 답변입니다. 그러나 컨스터블이 영국 미술 기관이 사랑하는 작가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생각하면 저에겐 인상 깊은 답변이었습니다. 그 사연을 보면 미술사가 미치는 영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더 인기있던 작가


컨스터블의 작품 ‘스트랫퍼드의 종이공장’은 그가 태어난 지역 공장의 풍경을 소박하게 담고 있습니다. 컨스터블은 자신이 나고 자란 서퍽 지역을 소재로 많은 풍경화를 그렸죠. 그런데 그가 작업을 한 무렵은 프랑스에서 바르비종 예술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이때 풍경화는 신화 속 이야기나 역사적인 사건을 담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컨스터블이 영향을 받았던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의 ‘성 우르술라의 출항’도 종교적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성인들의 일생을 담은 13세기 책 ‘황금 전설’ 속 일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거든요.

컨스터블은 이런 대가들의 작품을 공부하다 그림을 보고 그리는 것은 ‘간접적 진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죠. 그러면서 주변에 있는 풍경으로 눈을 돌립니다. 신화 속, 책 속 저 먼 곳이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있는 땅 영국의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21년 지금은 컨스터블의 대표작이 된 ‘건초 마차’가 로열 아카데미 연례전에 출품됩니다. 이 그림은 판매에 실패했지만, 프랑스 예술가들의 눈에 띄게 됩니다. 테오도르 제리코는 ‘건초 마차’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외젠 들라크루아에게 털어놓았고, 들라크루아는 컨스터블의 색을 보고 자신의 그림을 고쳤다고 일기에 적습니다.

그러나 역사도, 신화도 아닌 시골 풍경이 당시 영국인들의 눈에는 촌스럽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컨스터블은 영국에서 평생 단 20점의 그림을 팔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오히려 프랑스에서는 몇 년 만에 20점도 넘는 그림을 팔았는데 말이죠.

‘건초 마차’는 후일 영국계 프랑스인 딜러가 구매해 1824년 파리 살롱에 전시했습니다. 이 작품은 샤를 10세 프랑스 국왕이 주는 금메달을 수상하기에 이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실과 일상의 정직한 아름다움을 그리고자 했던 그의 작품은 바르비종 예술과 19세기 인상파 작가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프랑스는 이때부터 세계 미술사의 주도권을 완전히 쥐게 됩니다.

영국 미술사의 뒤늦은 인정


영국 미술사가 놓친 거장은 컨스터블 말고도 또 있습니다. 바로 같은 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는 윌리엄 터너(1775∼1851)입니다. 터너는 컨스터블과 달리 어린 나이에 인정받고, 아카데미 회원이 되어 생전에 존경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터너가 역사화를 그렸기 때문인데요.

중요한 변화는 터너의 말년에 일어납니다. 아카데미적 회화를 그리던 그는 마지막에는 거친 바다의 파도와 공기가 일으키는 빛의 효과를 주목한, 추상화에 가까운 작품을 그립니다. 지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상파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는 시도죠. 그런데 터너의 말년 그림은 역시 영국에서는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노망난(?) 화가의 이상한 그림 정도로 여겨졌죠.

클로드 모네, ‘붓꽃’, 1914∼17년경. 캔버스에 유화, 200.7x149.9cm.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 대신 영국에서는 19세기 라파엘 전파의 회화를 중요한 것으로 내세웠습니다. 이때 인상파 작가들이 도시의 평범한 일상을 찬양하고 현실을 노래했다면, 라파엘 전파는 다시 종교와 문학 등 과거로 돌아가고자 했죠. 회화적 기교는 뛰어나지만 세계 미술사의 흐름과는 맞지 않는 시도였습니다. 만약 컨스터블과 터너를 알아보았다면, 영국에서도 인상파를 뛰어넘는 예술가가 나올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런 패착을 되돌리려는 움직임을 최근 10여 년간 영국 미술 기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부터 인상파까지 흐름을 보여주는 전시인 국립중앙박물관 ‘거장의 시선’전에서도 컨스터블과 터너 작품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죠. 라파엘 전파 작품은 존 싱어 사전트의 소품 한 점만 포함돼 있습니다. 2021년 서울 노원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선보인 ‘빛: 영국 테이트미술관 특별전’에서도 터너와 컨스터블을 인상파 작품에 영향을 준 작가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미술 기관이 소장한 걸작들을 전시로 구성해 해외에서 수익을 내면서 자국 미술사를 선전하는 전략도 흥미롭습니다. 미술사를 쓰는 주도권을 잡는다는 것은 곧 자국 작가들을 성장하게 하며, 자국 예술의 가치도 높일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죠. 세계적 맥락에서 한국 미술사는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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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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