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지식과 선동가들
[세상읽기]
[세상읽기] 한승훈 | 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전공 교수
지역사 편찬 사업인 <전라도 천년사> 발간이 난항에 빠져 있다. 이 책의 고대사 집필자들이 단군조선의 존재를 부인했으며, 고대 전라도 지역이 왜의 식민지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추종하고 있고, 전라도가 문화적으로 낙후된 지역이었다고 주장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일각의 비난 때문이다. 이런 주장 하나하나를 다루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반박이 여러 통로를 통해 이미 이뤄지고 있는데다 애초 그 책에는 그런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날조이거나, 악의적인 오독이다. 현재 <전라도 천년사>의 전체 내용은 온라인에 공개돼 있어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일부 정치인과 언론은 사실 확인 없이 허구적인 문제 제기에 동조하며 사업 주체와 참여 연구진을 비난하거나, 사기꾼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기계적 중립을 지키고 있다.
사실 역사 연구자들에게 이런 상황은 낯설지 않다. 2014년 미국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의 ‘한국 고대사 프로젝트’, 2015년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 역사지도’ 편찬 사업 등에도 비슷한 인물들에 의한 유사한 공격이 있었다. 그들은 이들 학술사업의 결과물이 자신들의 쇼비니즘적 세계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구자들을 ‘식민사관’에 동조하는 매국노로 몰았다. 나아가 몇몇 정치인은 그들이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문호를 열어줘 학술사업의 중단에 협조했다. 이들 사건은 해외 대학의 한국학 연구, 그리고 지리정보체계(GIS)를 활용한 역사 연구에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남겼다.
왜 역사 영역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역사는 과학과 더불어 현대사회에서 강력한 권위를 가지는 지식 형태다. 이른바 유사역사학은 유사과학 담론과 비슷한 형태를 지닌다. ‘식민사학자’들이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은폐, 왜곡하고 있다며 대규모 연구사업이 있으면 마치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패턴은 과학에 대한 음모론에서도 발견된다. 다시마, 사탕무 따위에서 추출되는 글루탐산나트륨(MSG)이나 우유의 단백질 성분인 카세인나트륨이 마치 위험한 물질인 것처럼 공포감을 조장하는 마케팅, 공중보건에 심대한 해악을 끼치는 백신 거부 운동이나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 운동 같은 것들 말이다.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 과학적 세계관을 이용, 모방, 공격하는 가짜 지식들은 주로 그것을 통해 이익을 보는 이들에 의해 생산된다. 그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은 제도 내 연구자 집단과 시민 사이를 갈라놓아 전문적 지식에 대한 신뢰를 떨어트리는 것이다. “합성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기존의 조미료, 의약품, 화장품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것은 “자연 친화적 천연물질”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상품을 파는 데 도움이 된다. 전문가들의 개입을 차단하며 정책결정자들과 다수 대중을 가짜 지식으로 길들이는 일은 무엇보다 돈이 된다.
한편 역사학계에 대한 공격은 상업적 이익보다는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와 관련돼 있다. 학문적 역사는 민족의 자부심이나 국가 정체성과는 관련이 없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문헌, 구술, 유물 등의 자료를 비판적 태도로 수집, 비교하고, 그를 통해 시대착오나 오류를 최소화하며 과거에 대한 의미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이다. 반면 역사를 방법이 아닌 신념이나 교리로 취급하는 이들은 사람들이 과거 문헌을 경전처럼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우리” 사료는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거나, <일본서기>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식민사관에 동조하는 것이라거나, 대부분 학자는 일본인들과 학문적 계보가 이어져 있으니 일본을 추종할 것이라는 등의 주장은 역사를 배타적 신앙고백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국가주의적 역사교육의 세례를 받은 세대의 관료, 정치인, 언론인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편리한 논법이다.
물론 전문가 집단이 모든 사안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학문은 다양성을 보장하고 검증과 비판에 열려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학계는 결코 하나의 목소리만을 내지 않는다. 반면 가짜 지식은 대중의 선입견과 잘 호응하는 단순한 메시지를 집요하게 반복하여 각인시킨다. 그 최악의 결과는 사회의 공적 역량이 공동체의 지적 자산을 증진하는 데 이용되는 대신 사기꾼들의 수중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여성, 84살 돼서야 가사노동 남에게 기댄다…남성은 47살부터
- “식사시간 아까워 생라면…” 유족 울린 고 주석중 교수 연구실
- 선동이라더니…정부 ‘수산물 안전’ 예비비 177억 추가 편성
- 생후 4개월, 팔다리 굳더니 바르르…주삿바늘 쥔 의사는
- 윤 대통령이 출제한 ‘공정 수능’, 그 자체가 킬러 문항이다
- “이태원 참사는 피해자 탓” 인권위원 이충상의 인권침해
- 맨다리에 기저귀 차고 피란…우크라 ‘인간 충격 보고서’
- 농심 “신라면·새우깡 가격 인하”…정부 전방위 압박에 ‘백기’
- ‘공장 1시간 멈춤=4500만원’ 깎아준대도, 노동자는 억울하다
- 오늘 낮 31도까지…장맛비 목요일 다시 전국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