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하고 짧은’ 기사를 찾아서

박현철 2023. 6. 26. 18: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편집국에서]

게티이미지뱅크

[편집국에서] 박현철 | 서비스총괄

“지면엔 4장으로, 디지털로는 충분히 쓰겠습니다.”

기사를 디지털로 내보내기 시작하던 초창기 뉴스룸에서 흔히 오가던 말입니다. 여기서 4장이란 ‘200자 원고지 넉장 분량’을 말합니다. 양에 맞춰 줄일 필요 없이 넉넉하게 기사를 쓸 수 있다니, 생소하고 막막한 디지털이 기자들에게 주는 한줄기 빛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득한 옛이야기 같지만 불과 10여년 전 상황입니다.

여전히 ‘디지털 기사=길게 써도 되는 기사’로 이해하는 기자들이 있습니다. 원고지 4장 분량으로 전달 가능한 이야기를 8장, 12장에 담는 기사들도 많습니다.(요즘 잘 쓰지도 않는 원고지 분량 짐작이 어려우시죠? 이 칼럼 전체 분량이 원고지 10장입니다.) 여전히 디지털은 제한이 없는 공간입니다. 길게 쓴다고 문제 될 건 없습니다. 다만 이건 기사를 쓰는 처지에서의 얘기입니다. 중요한 건 기사를 쓰는 기자가 아니라 기사를 읽는 독자겠죠.

기사의 길이는 기사를 읽는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디지털 공간에서 기사를 선택해서 읽는 과정은 보통 이렇습니다. ①‘적절한 제목+이미지(섬네일)’가 달린 기사를 클릭한다. ②기사를 읽는다. ③‘뒤로 가기’나 ‘창 닫기’를 누른다.(관련 기사나 많이 본 기사를 클릭하기도 합니다.) 기사를 쓰는 기자나 저 같은 일을 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건 ①에서 ③까지 걸리는 시간입니다. 그게 길었으면 하는 게 저희의 바람입니다. 독자의 시선과 관심이 기사에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독자가 읽는 기사의 양, 즉 기사에 머무는 시간은 독자가 결정합니다. 기사가 길다고 오래 머무르지도 않고, 짧다고 짧게 머무르는 것도 아닙니다.

최근 “글은 짧은 게 최고”라는 말을 263쪽 내내 외치고 있는 책을 한권 발견했습니다. 제목은 <스마트 브레비티>(Smart Brevity). 미국의 인터넷 매체 <액시오스> 창업자와 편집국장이 쓴 책입니다. 책은 ‘우리가 하나의 글이나 정보를 읽는 데 들이는 시간은 26초’라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①에서 ③까지 26초가 걸린다는 얘깁니다. 독자는 26초 동안 글(기사)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다음 두가지 질문을 스스로 한다고 합니다. 첫째, 도대체 이게 뭔가? 둘째, 내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는가?

이 두 질문의 답을 26초 안에 내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독자와 인사를 나누거나 농담을 하거나 에둘러 얘기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대신 강력한 첫 문장이 필요하다고 책은 강조합니다. 그리고 ‘팩(트)폭(행)’이 이어집니다. “언론사의 작은 비밀 중 하나는 대부분의 기자가 견고한 첫 문장을 쓰는 데에 영 재능이 없다는 사실이다. 기자들은 그걸 하라고 돈을 받는데도 여전히 쩔쩔맨다.”

저는 ‘강력한 (그리고 짧은) 문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사실, 마치 저의 아바타를 만난 듯 반가웠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고 있기 때문인데요. 현실이 책 속 가르침처럼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타깝게도 세상의 많은 일들이 26초 안에 전달 가능할 만큼 단순하거나 ‘납작’하진 않습니다. 기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정보만 선택해서 전달하는 과정에서 뒤따르는 부작용도 있겠죠. 직접 판단할 수 있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주길 원하는 독자들도 많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수많은 기자가 기사를 얼마나 길게, 또는 짧게 써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답이 없는 질문인데 말이죠. 중요한 건 특히 독자에게 중요한 건 길고 짧음이 아니라 ‘얼마나 영리한(smart) 기사인가 아닌가’겠죠. 책도 “짧게, 하지만 얕지 않게”를 강조합니다. 기자들은 다시 고민에 빠집니다. 짧게 쓰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얕지 않게 짧게 쓰는 건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유튜브로 뉴스를 보는 게 대세인 시대입니다. 텍스트로 된 기사가 언제까지 독자들에게 가닿을 수 있을까요. 짧든 길든, 영리하든 안 하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만, 26초 안에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보는 수밖에요. 안타깝게도 책은 영리하게 글 쓰는 법을 알려주진 않습니다. 의외로 중요한 건 책에 잘 없는 것 같습니다. 일단,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원고지 10장에 늘어놓고 있는 저부터 돌아봐야겠습니다.

fkcool@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