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작성의 기쁨과 슬픔…공무원들은 떠난다

한겨레 2023. 6. 26.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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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2023년도 지방공무원 9급 공개채용 필기시험이 치러진 지난 10일 오전 서울시 공무원 지원자들이 종로구 경복고등학교에 마련된 시험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유상준 | 우정사업본부 경기광주우체국 7급 공무원

이런저런 사회생활을 거쳐 나이 마흔에 공무원으로 입직한 뒤 문서와 관련해서 처음 들었던 말은 “공무원은 문서로 말한다”였다. 공무원은 업무를 문서로 한다. 주로 하는 일이 문서 작성과 검토, 결재 등이다. 일반 사회와 공직사회를 견주면, 공무원이 다른 사무직보다 문서 작성을 월등히 많이 한다. 실무직 공무원의 직명이 서기, 서기보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공무원은 한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다방면의 능통자여야 한다. 공무원은 인사 원칙과 필요에 따라 인사이동을 한다. 그래서 내가 언제, 어떤 일을 담당하더라도 그 자리가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지,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해야 한다. 물론 인계인수라는 것이 있지만 한정된 시간 안에 모든 업무를 습득하기란 불가능해서 갑자기 생소한 업무를 맡아 처리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때 가장 효과적인 시스템이 바로 문서와 품의 제도다. 이를 통해 어떤 업무가 무슨 뜻으로 발의되고 누구를 거쳐 시행됐는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공무원은 주기적 감사를 통해 업무에 대한 평가를 받는데 이를 위해서라도 공무원은 증거가 되는 문서를 잘 관리해야 한다.

사람들은 공무원들이 변화에 둔감하고 복지부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무원처럼 시류에 민감하고 빠르게 대응하는 집단도 없다. 공무원들은 관련 분야의 정책이나 언론보도 내용, 여론 등을 매일 모니터링하며 잘못 알려진 사실에 대해서는 즉시 해명을 내놓고 부족한 점은 다음날이라도 ‘개선책’을 만들어 일선까지 시달한다. 필자가 보기에 공무원 사회의 진짜 문제는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던 일을 무비판적으로 지속하는 구조에 있다.

일선 공무원들은 기관으로부터 어떤 일에 중점을 두라고 새로 지시받거나 감사에서 지적받는 일은 많아도, 전부터 하던 일을 오늘부터 축소하거나 폐지하라는 지시는 좀처럼 받아본 적이 없다. 세상의 필요에 따라 새로 해야 하는 업무가 있다면 그에 따라 할 필요가 없고 중요도가 떨어지는 일도 있을 텐데, 공무원 사회에서는 기존에 하던 업무를 상당 기간 지속하며 여기에 새로운 업무를 쌓아 올린다. 이러한 현상을 필자는 ‘공무원 업무 체증의 법칙’이라 부른다. 공무원의 업무가 이처럼 늘어나면 개개 공무원들이 격무에 내몰리면서 업무 만족도는 떨어지고 보이지 않는 곳부터 형해화한다. 곧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은 채 ‘감사에 대비한 문서 만들기’를 반복한다.

공무원 업무 가운데 문서 작성은 일의 시작이자 마무리여서 대개 문서–일–문서로 이루어진다. 업무의 형해화란 정작 중요한 ‘일’은 축소되거나 생략된 채 문서-문서만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선생님이 가르치는 일보다 학사 행정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일반 공무원들이 민원 처리보다 행정문서 만드는데 진력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가지 예를 들겠다. 기관에서 어떤 교육을 한다고 할 때, 주무관은 무슨 필요로 교육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만든다. 그런 다음 ‘일’에 해당하는 실제 교육은 생략하거나 형식적으로 서명만 받고, 그것을 근거로 결과 보고 ‘문서’를 만든다.

공무원의 업무상 문서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므로 문서를 만드느라 공무원의 실제 역할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감사 방식을 지적과 적발 위주에서 전반적인 업무 평가로 바꿔야 한다. 현장에서는 하나의 지적 사항을 피하기 위해 백 가지 문서를 만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감사에서 불필요한 일은 하지 말라고 지적하고, 기관도 주기적 평가를 통해 일의 성격을 구분해 시의성이 떨어지고 불필요한 업무는 과감히 폐지하는 ‘일 버리기’를 제도화해야 한다.

공직사회의 수십 년 관행을 하루에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서 잘 만드는 공무원이 아닌, 국민에 봉사하는 공무원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엠제트(MZ)세대인 젊은 공무원들이 입직 초반에 그만두는 원인을 ‘돈’보다는 ‘일’의 측면에서 보자. 평균 수험기간 3년을 거치며 새내기 공무원들은 급여나 연금 등 처우에 관해 어느 정도 알게 된다. 반면 임용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실제 공무원이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다. 어렵게 들어온 새내기들이 이직을 고민하는 이유는 사회적 보상(돈)이 아닌,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일(하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섣부른 추측일까?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무원이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매달린다면 국민을 위한 서비스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뜻한다. 공무원이 행복해야 국민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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