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영의 세상만사 <5>] 산업 정책의 귀환 그리고 미·중 경쟁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2023. 6. 2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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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반도체 등 특정 산업을 지원하는산업 정책을 적극 펼치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오랫동안 미국은 산업 정책이 없는 국가로 여겨졌다. 특정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정책적 노력이나 계획이 존재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시장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국가로 인식됐다. 국가는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의 역할만 하는 곳이 미국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최근 잇따른 미국의 변화를 통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됐다.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390억달러(약 50조2500억원) 상당의 보조금을 기업에 직접 지원하는 방식으로 특정 산업의 유치와 강화를 추진하기도 하며, 기술의 해외 이전과 서비스 제공을 엄격하게 제한해 공급망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경쟁국을 노골적으로 견제하기도 한다. 첨단제조업 육성을 위한 미국의 변화는 하나로 연결돼 있던 글로벌 공급망의 분절을 가져오고 있으며, 시장 접근과 투자를 교환하도록 해외 기업에 강요하고 있다.

2023년 미국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보이는 손이 되어가고 있으며, 전략적 판단에 따라 특정 산업의 육성을 위해 필요하다면 당근과 채찍을 사용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국가로 변화하고 있다.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공학박사, 전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

잃어버린 제조업 되찾기 나선 미국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미국은 20세기 초반부터 오랫동안 제조업 국가였다. 미국의 제조업은 1970년대 후반 일본의 도전으로 첫 번째 위기를 맞이했으며 1980년대 초반 인플레이션에 맞서기 위한 초고금리 정책으로 인해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미국의 기준금리가 18.5%에 이르자 미국 달러 가치는 치솟았고, 이 여파로 인해 미국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은 무너졌고 수입 제품들이 미국 시장을 차지하게 됐다. 견디지 못한 미국 제조업체들은 동아시아 또는 중남미로 생산 거점을 이전했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80년대에 걸쳐 미국은 1900만 개의 제조업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됐다. 그리고 2000년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하면서 중국 등 해외로부터의 수입이 다시 증가하면서 미국은 다시 전체 제조업 일자리의 33%를 상실했다.

이런 상실의 시대를 겪은 미국으로서는 잃어버린 제조업 일자리를 되찾는 것은 미국 정치인들의 숙원이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은 셰일 개발을 통해 에너지 가격의 극적인 하락을 통해 전 세계 국가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생산 비용을 감소시킨 국가가 됐다. 하지만 당초 기대했던 제조업체들의 미국 귀환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 위주로 형성된 글로벌 가치사슬(GVC)과 더불어 미국 내에서 제조업에 대한 인식이 낮아졌기 때문이었다. 인터넷과 IT로 대표되는 새로운 분야의 등장과 같은 혁신이 이뤄지면서 미국에서 제조업은 발명과 연구개발(R&D)의 부수적 요소로 간주했다. 첨단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면 실제 물건을 만드는 것은 싸게 만들 수 있는 누군가에게 의뢰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식은 미국의 첨단 기업들에 높은 이윤율을 보장해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생태계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공장에서 실제로 물건을 만드는 것은 실험실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공정 지식과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데 미국의 산업계는 이것을 상실했던 것이다. 인텔의 전 최고경영자(CEO) 앤디 그로브는 이러한 흐름에 대해 미국 산업계가 창조의 신화에 빠져들고 있으며, 혁신을 시장에서 구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양산 규모의 확대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했으나 혁신과 창의력에 도취된 21세기 미국 사회에서 무시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제조업에 대해 안일한 태도를 보이던 미국이 최근 방향을 전환하는 것은 중국의 성장을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중국은 미국인에게 해외에서 수입된 부품들을 저렴한 인건비로 조립해 물건을 만드는 국가로 인식됐다. 2007년 중국에서 아이폰이 처음 생산되기 시작했을 때 중국이 아이폰의 부가가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 미만이었다. 하지만 10년 후 아이폰 X가 등장한 2018년 중국의 몫은 25% 이상으로 늘어났다.

중국 기업들은 외국 부품을 조립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체적으로 첨단 기술에 기반한 최첨단 제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태양광 패널 등 재생에너지를 비롯해 인공지능(AI), 양자컴퓨터 등 최첨단 분야에서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과학적 리더십이 필연적으로 산업적 리더십으로 이어진다는 통념과 달리 중국은 산업의 생산능력 확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공정 기술을 이용해 미국이 예상하지 못한 경로로 미국을 앞지르고 있다.

중국의 산업 정책 3단계

일반적으로 중국의 산업 정책은 정부가 기술개발을 위해 많은 돈을 지원해 주고 외국 기업의 경우 중국 기업과의 합작법인 설립을 의무화함으로써 기술을 확보하고 해외 기업의 중국 내수 시장 접근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자국 기업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중국의 산업 정책은 분야별로 다르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정책과 수단들이 동원되고 있다.

특정 산업을 육성하고자 할 때 중국의 산업 정책은 크게 3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대규모 보조금을 통한 신규 진입의 촉진이다. 어렵지 않은 조건을 충족할 경우 까다롭지 않게 보조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기업의 투자가 이뤄진다. 필연적으로 특별한 기술력과 차별화 요소가 없는 고만고만한 기업들의 난립과 경쟁 그리고 도태가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기업들이 등장하게 되고 본격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일단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되면 두 번째 단계로 ‘우산 아래에서의 성장’을 도모한다. 살아남은 기업들에 시장을 밀어줌으로써 빠른 성장을 달성하게 지원한다. 아직 해외 기업에 비해서 자국 기업의 기술력과 경쟁력이 취약한 단계이기 때문에 관세 또는 비관세 장벽을 동원해 해외 기업들의 시장 진입을 차단하거나 최대한 억제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공급망과 관련된 자원 수급 및 연관 산업의 발전을 지원함으로써 균형 잡힌 성장을 위한 토대 구축을 지원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수 시장에서 기술력과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은 점차 대형화와 집중화 과정을 거치게 되고 압도적인 생산력을 갖추게 된다.

세 번째 단계로는 이 기업들이 해외에 진출하도록 지원하면서 동시에 시장을 해외에 개방하고 그동안 지급되던 보조금을 단계적으로 감축한다. 중국 기업들은 세계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하면서 시장점유율을 높여나가고 해외의 경쟁 기업들은 답보 상태에 머무르거나 도태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중국의 산업 정책은 태양광 패널과 이차전지 분야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5G(5세대 이동통신) 네트워크에서 거의 성공하는 듯했으나 대표 기업인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압박으로 인해 완성되지는 못했고 반도체의 경우 미국의 공세로 인해 기로에 서 있는 상황이다.

중국의 급속한 성장은 미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비롯한 제도적 뒷받침을 통해 2021년만 해도 55GWh에 불과하던 미국 내 이차전지 생산량은 현재 추진 중인 것만을 합해도 2030년이면 1000GWh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반도체 역시 TSMC를 비롯한 세계적 업체들의 미국 내 투자가 증가하고 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폭발적인 투자가 진행되면서 우리나라 최대 수출 시장이 20년 만에 중국에서 미국으로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산업 정책이 성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인력의 부족이다. 40여 년간 제조업 붕괴를 겪은 미국에서 제조업 현장 근무 인력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여기에 더해 지속되고 있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투자 부담도 문제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규모 투자에 따른 과잉생산 가능성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동맹국의 첨단산업 기술 및 관련 기업들을 미국으로 이전시키는 데 대한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점이다. 세계화의 시대가 저물고 강대국 간 첨단 기술을 둘러싼 경쟁이 국가 주도 산업 정책을 통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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