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학수의 골프 오디세이 <138> 삼성물산 잔디환경연구소 김경덕 소장 인터뷰] ‘논두렁’ 혹평 K리그 운동장의 변신…‘안양중지’ 만든 연구소 작품
월드컵과 EPL(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을 경험한 울산현대축구단의 이청용(35)은 올 시즌 경기를 뛰면서 “비가 많고 더운 여름을 보내야 하는 한국 기후 특성상 잔디 컨디션이 아쉬울 때가 있었는데, 최근 구장 잔디가 더 푸르고 부드럽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만족해했다. “전체적인 경기력이 상승했고, 선수들이 주저 없이 과감한 경기를 펼칠 수 있을 정도로 잔디 상태가 좋아졌다”고 덧붙였다. 2년 전 움푹 팬 운동장과 시든 잔디로 ‘논두렁 운동장’이란 혹평을 받던 국내 프로축구 K리그의 경기장이 최근 환골탈태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국프로축구연맹(이하 프로축구연맹) 한웅수 부총재는 “K리그 잔디는 2002년 월드컵 경기장을 건설하면서 유럽 축구에서 사용하는 켄터키 블루그래스를 도입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데 짙은 녹색의 시원한 모습이 매력적이지만 한지(寒地)형 잔디이다 보니 국내의 찜통더위를 견디지 못해 훼손이 심하고 병도 들기 쉬운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박지성의 EPL 진출 이후 손흥민에 이르기까지 한국 선수들 활약이 이어지면서 국내 축구팬의 눈높이는 EPL 수준으로 높아졌다. ‘논두렁 운동장’에 골머리를 앓던 프로축구연맹은 “당장 잔디를 바꿀 수는 없으니 관리 역량부터 끌어올리자”는 결론을 내리고 전문 기관을 찾아 나섰다. 삼성물산 잔디환경연구소는 1993년 국내 최초로 설립된 잔디 전문 R&D 기관이다. 각종 식물과 골프장 잔디에 관심이 많았던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골프장 잔디 관리 방법을 고민해달라고 주문하면서 세워져 안양중지와 그린에버 등 신품종을 개발해 한국 골프장의 잔디 수준을 높였다.
2021년 시즌을 앞두고 프로축구연맹은 삼성물산 잔디환경연구소와 축구 관리 컨설팅 계약을 맺었다. K리그1 12개 팀과 K리그2 11개 팀 등 총 23개의 국내 축구장이 대상이었다. 잔디환경연구소는 봄과 여름, 1년 2회 각 구장을 방문해 잔디 상태를 진단하고 개선 방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각 구장에서 잔디에 문제가 생길 경우 즉시 협의하고 긴급 처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6월 12일 잔디환경연구소는 2년 전과 비교해 전국 23개 축구장 평균 잔디 밀도는 16.2%, 색상 지수는 11.6% 증가했고, 단기간 변화가 크지 않은 뿌리 길이와 식생 지수도 2%가량 늘어났다는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같은 변화는 축구장 전체 잔디 생육 상태, 경도 등 개선으로 이어져, 선수들 부상 방지뿐 아니라 패스나 슈팅의 정확도를 향상시켜 경기력 유지에 도움이 된다. K리그는 ‘그린스타디움상’을 만들어 그라운드 관리에 적극적인 구단에 시상도 하고 있다.
지난 2년간 K리그 경기장 잔디 컨설팅을 이끈 김경덕 삼성물산 잔디환경연구소 소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는 잔디환경연구소에 17년간 근무하며 예보 시스템을 개발하고, 신품종 그린에버 개발에 큰 역할을 한 전문가다.
골프장 잔디 관리와 축구장 잔디 관리는 어떻게 다른가.
“국내 골프장 티잉 구역 잔디는 켄터키 블루그래스가 많아서 그 경험이 같은 잔디 품종을 사용하는 국내 축구장 관리에 도움이 됐다. 스포츠 경기에 사용하는 잔디는 크게 품질과 건강도라는 두 가지 항목을 주로 점검한다. 품질을 비교할 때 골프장은 시각적 품질과 스탠스(어드레스 때 두 발의 자세) 안정성을, 축구장은 시각적 품질과 경기장 평탄성을 주요 요소로 본다. 건강도를 비교할 때는 골프장과 축구장 모두 잔디 밀도와 유효 뿌리 길이, 색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축구장 잔디는 양 팀 22명의 선수가 계속해서 뛰기 때문에 경기장 전체 잔디에 외부 압력이 가해지는 ‘답압 지수’가 매우 높다. 그리고 슬라이딩 등 과격한 동작이 많아 표면 잔디 피해가 더 큰 편이다. 잔디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에어레이션 등 잔디 토양을 개선하는 작업을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 축구장은 또 울퉁불퉁한 지역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평탄성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2002 월드컵 경기장은 돔 형태 구장들이 많다. 아름답지만 통풍이 안 되는 구조다. 그늘도 많이 생긴다. 한국의 혹서기에 켄터키 블루그래스는 견디기 어렵다. 여름이 되면 잔디를 바꿔줘야 하는데 잔디가 뿌리 내릴 새도 없이 경기가 이어지다 보니 잔디가 쉽게 들렸다. 우선 잔디를 교체할 때 깊게 떠서 심도록 했다. 대부분 국내 잔디 농장은 잔디 길이 2~2.5㎝로 뜬다. 그 이상은 무거워서 유통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잔디 깊이를 5㎝ 이상으로 깊게 해서 쉽게 들리지 않도록 했다. 잔디가 활착하려면 2주 이상 필요하기 때문에 K리그에 될 수 있는 대로 일정을 조정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프로축구연맹과 잔디환경연구소가 컨설팅계약을 체결하고 1년 뒤인 지난해 2월 FC 서울의 기성용(34)은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원정 경기를 마치고는 “항상 인천 원정을 갈 때면 부상과 경기 걱정을 하게 된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경기장 잔디 상태가 너무 좋지 않다. 선수들은 부상에 노출되고 경기력도 아쉬울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글을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다. 축구 종가인 영국 잔디를 밟아본 국가대표 출신 베테랑 기성용의 작심 발언에 잔디 프로젝트를 맡았던 관계자들은 크게 당황했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은 어떻게 문제를 풀어갔나.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은 다른 경기장보다 지반이 더 낮다.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데다 염도가 높고 물이 금세 빠지는 토양이어서 물을 주고 비료를 뿌려도 토양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송풍기를 활용해 통풍이 나아지도록 하고, 뿌리가 아닌 잎에서 흡수할 수 있는 비료를 사용하도록 추천했다. 봄철에 비료를 많이 주어서 잔디가 많이 번질 수 있도록 바꾸었다. 인산제 비료를 많이 사용하도록 해 뿌리가 잘 자라도록 했다. 이렇게 축구장에 맞게 관리 프로그램을 다양화하고 양질의 흙을 보충해 토양 환경을 개선하고 손상된 잔디를 새로 교체하는 등 효과적인 조치를 하면서 점차 좋아졌다. 경기장의 평탄화를 위한 롤링 작업 방식도 과학적 수치에 기반을 둬 구장의 컨디션에 따라 롤러 무게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K리그 잔디 상태가 EPL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관리 매뉴얼을 확립하고 한국 축구장에 적합한 새 잔디 품종을 개발하는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 EPL에서 운동장과 잔디 관리에 사용하는 비용과 K리그의 차는 아주 크다. EPL처럼 축구장 관리를 구단에서 전문적으로 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현재 K리그 경기장은 각 시·도 재산으로 관리도 지자체가 맡고 있어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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