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킬러 문항 속성 대비" 한술 더 뜨는 대치동 학원가

'공정수능' 혼란 겪는 학원가·학교 가보니
"민감한 시기만 피해가자"
카르텔 주범 지목 '킬러문항'
설명회·홍보문구서 삭제
일선학교도 진학상담 차질
"정시 노리던 아이들 날벼락"
수험생 집단반발·국민청원도

◆ 사교육 대책 ◆

정부가 사교육비 경감 대책을 발표한 26일 서울 대치동 학원가 한 건물 벽면에 입주해 있는 학원들이 안내돼 있다. 이충우 기자

"교재에서 우선 '킬러'라는 단어만 뺐습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등 일대에서 7년째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박 모 강사는 "학원은 설명회를 준비하는 한편 문구를 검수해 홍보물을 다시 제작하는 중"이라며 "학생들에게는 오는 9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모의고사를 보면 수학능력시험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있으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다독이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26일 찾은 사교육 일번지이자 정부로부터 '사교육 카르텔'의 주범으로 꼽힌 대치동 학원가는 대응책 마련으로 부산한 모습이었다. 사교육 대책의 일환으로 수능에 '킬러 문항'이 제거된다고 했지만, 이 같은 정책이 앞으로 있을 모의고사와 수능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 의문인 상황이어서 여전히 학부모와 학생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대치동 학원가는 킬러 문항 대신 '준킬러 문항' 마케팅을 펼치고 있으며, 속속 입시설명회나 개인 상담을 통해 학생과 학부모의 혼란과 불안감을 파고드는 모습이다. 한 입시학원 관계자는 "수험생 입장에선 수시 상담 등 입시 상담이 빈번하게 벌어져야 할 시기에 어수선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학원가에선 최근 논란이 되는 '킬러 문항'에 대해 발 빠르게 흔적을 지우면서 새로운 마케팅에 돌입했다. 유명 인터넷 강의(인강) 강사들은 문제집에서 '킬러'라는 표현을 삭제하거나 앞다퉈 광고 문구 등을 없애고 있다. 실제로 여러 인강 강사는 강의명에 들어갔던 '킬러' 대신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자체검열에 나섰다. 강사들은 킬러 문항 관련 커리큘럼을 수정하거나 없앴다. '준킬러 문항'이 자리를 대신할 것으로 예측되면서 '준킬러 문항'과 '비킬러' 등 표현을 사용한 다양한 마케팅이 이뤄지고 있다.

대치동 학부모들은 수능을 5개월 앞두고 사교육 단속에 다선 정부의 행보를 지적했다. 강남구에서 고등학교 2학년생 자녀를 키우고 있는 40대 학부모 김 모씨는 "6월 평가원 모의고사까지 끝났는데 이렇게 손바닥을 뒤집듯이 수능 기조를 바꾸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정책"이라며 "주변 학부모 모두 한목소리로 교육부를 성토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강남구의 학교들은 킬러 문항이 없어지면서 변별력 논란이 불거지자 앞으로 공부나 입시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다. 강남지역 고등학교에서 3학년 담임교사를 맡은 A씨는 "킬러 문항이 없어지면서 수능의 변별력이 줄어들 수 있으니 내신 성적에도 집중하라고 당부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 역시 대통령의 '공정 수능' 지시로 인한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부 수험생은 이번 혼란에 크게 불만을 드러내며 온라인에서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한 수험생 모임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현 지침을 철회하거나 관행을 준수해 서서히 시행해달라. 교육 정책을 일방적이거나 졸속으로 추진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했다. 국민동의청원에 수능 관련 청원도 등장했다. 지난 21일부터 시작한 청원에서 글쓴이는 정부에서 수능의 난도와 범위에 대해 갑작스러운 변화를 요구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청원은 공개된 지 약 5일 만에 6000명 넘게 동의한 상태다.

교육부가 대학별고사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겠다는 뜻을 보이면서 대학들도 긴장한 모습이다. 대입 수시평가의 공정성 강화로 인한 조치로 대학별고사가 현행 교육과정 수준이나 범위를 벗어났는지를 명확히 공개해야 한다.

학교 교사들은 '킬러 문항'으로 인한 사교육 유발 효과를 억제해야 한다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다만 학교 현장에서 실효성 있게 적용될 수 있게 정책이 잘 안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세종과학예술영재학교에 근무하는 이정환 수학교사는 "수업시간에 다루는 문제들은 학생들 성장을 도모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킬러 문항은 학교 수업에서 다루기 부적절하다"며 "학교 내에서 킬러 문항을 다뤄줄 수 없기 때문에 사교육 현장에서 킬러 문항의 변형 문제 등을 풀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므로, 킬러 문항을 배제하는 것이 큰 방향에서는 맞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교사는 "사교육시장은 결국 변형된 모습으로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부모의 교육열이 사교육시장의 원인이라면 이를 고려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전직 고등학교 국어 교사 B씨는 "독서나 읽기를 가르칠 때 텍스트 난도라든지, 사고 능력이라든지 이런 것을 고려해야 한다"며 "일부 수능에 출제된 킬러 문항은 적절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B씨는 "문항을 풀 때는 여러 전략이 개입되고 사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학생이 아무리 역량이 있다고 하더라도 텍스트 난도가 학생 수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사고력이 발현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상헌 기자 / 김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