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은 축구를, 윤석열은 교육을 살렸다’는 착각 [박찬수 칼럼]

박찬수 2023. 6. 26. 14: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찬수 칼럼]집권 1년을 넘긴 윤석열 정부의 가장 걱정스러운 지점이 바로 여기다. 대한민국 명운이 걸린 국정 어젠다를 국민에게 제시하고 진중하게 접근하기보다, 대통령의 단편적인 말 한마디에 정부부처와 정치권, 언론까지 춤추듯 움직인다. 어떻게 장관이나 집권당 고위 인사가 ‘대통령이 입시비리 수사를 해봐서 교육은 누구보다 잘 안다’는 낯 뜨거운 말을 서슴없이 할 수가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5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한미동맹 70주년 특별전’을 관람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찬수

ㅣ대기자

1983년 5월8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슈퍼리그 개막전을 찾은 전두환 대통령은 축구협회와 구단 관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축구는 게임이 빠르고 선수들의 묘기가 속출해야 팬이 늘어난다. 우리나라 축구를 살리려면 공격형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 발언은 이튿날 조간신문 1면에 <전 대통령, “공격형 축구로 발전시켜야”>라는 제목으로 큼지막하게 실렸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이 발언을 계기로 축구계가 온통 ‘공격형 축구’ 변신을 위한 노력에 사활을 걸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닷새 뒤인 5월14일치 <매일경제>엔 ‘한국축구 패턴이 바뀐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 축구가 크게 변모하고 있다. 수비 위주의 스타일에서 공격으로 바꿔, 호쾌한 맛을 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공격형 축구는 최근 전 대통령의 권장으로 슈퍼리그 각 구단은 물론 실업팀에서도 연구가 활발하며 축구 중흥의 길잡이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침체에 빠졌던 한국축구가 공격형 축구로 10여년 만에 소생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 뒤 한국축구가 어떤 경로를 거쳐 세계적 수준에 가까워졌는지 우리는 잘 안다. 전 대통령의 탁월한 지도 덕분은 아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준비하고 치르면서 한국축구는 한 단계 도약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들썩이게 한 수능 ‘킬러 문항’ 논란을 보면서 40년 전 일을 떠올리는 건 왜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이주호 교육부 장관에게 “학교 수업만 열심히 따라가면 문제를 풀 수 있게 출제하라”고 지시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만 해도 ‘너무 당연한 지시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그 이후 진행과정은 5공 시절의 ‘공격형 축구’ 지시만큼이나 황당하기 그지없다. 수능 출제를 책임지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과 교육부 대입 담당 국장이 갑자기 사퇴했다. 교육부와 평가원에 대한 감사가 시작했다.

이주호 장관은 대통령 지시를 신속하게 이행하지 못한 점을 사과했다. “윤 대통령이 검사 시절 입시 관련 수사를 한 경험이 있다. 저도 전문가이지만 많이 배운다”며 대통령의 통찰력을 추켜세웠다. 이쯤 되면 5공 시절의 관료적 분위기와 다를 게 없다. 전두환 대통령이 육사 시절 골키퍼를 해서 축구에 누구보다 해박하다고 칭송하면서 한국축구의 활로를 찾은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었던 거 아닌가. 그러나 대통령 한마디에 한국축구나 교육의 방향이 바뀌는 게, 사실은 바뀐다고 착각할 뿐이지만, 과연 정상적인 나라이고 정부라고 할 수 있을까.

킬러 문항과 교육계 이권카르텔을 비판하는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할 생각은 없다. 윤 대통령은 정말 그렇게 믿을 것이고, 일부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 문제가 킬러 문항의 출제 경위를 감사하고 수사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으리란 건 분명하다. 집권 1년을 넘긴 윤석열 정부의 가장 걱정스러운 지점이 바로 여기다. 대한민국 명운이 걸린 국정 어젠다를 국민에게 제시하고 진중하게 접근하기보다, 대통령의 단편적인 말 한마디에 정부부처와 정치권, 언론까지 춤추듯 움직인다는 점이다. 어떻게 장관이나 집권당 고위 인사가 ‘대통령이 입시비리 수사를 해봐서 교육은 누구보다 잘 안다’는 낯 뜨거운 말을 서슴없이 할 수가 있을까.

대통령 임기는 5년이다. 역대 대통령실에서 일했던 인사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이 말하는 게 집권 1년차의 중요성이다. ‘임기 첫해가 매우 중요하다. 이때 국정 어젠다를 국민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지지를 얻어 집권 2년차 늦어도 3년차엔 성과를 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집권 1년이 지나도록 앞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교육개혁과 노동개혁, 연금개혁을 ‘3대 개혁과제’로 제시했지만, 그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준비해서 국민에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통령이 생각나는 거를 갑자기 툭 던지면 정부부처와 여당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반사적 반응을 보이고 사회적 논란만 키운 게 전부다. 주 69시간제 논란이 그렇고, 킬러 문항이 그렇다.

모든 개혁엔 이해가 충돌한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 의견을 수렴하고, 설득하고, 어려움을 돌파할 힘을 갖추는 게 대통령이 할 일이다. 그런데 내용이 부실하다 보니 현 정부는 오로지 검·경 수사나 감사원 감사에만 기대고 있다. 노동개혁은 민주노총과 건설노조 수사로, 교육개혁은 이권카르텔 수사로 국민에게 성과를 과시하려 든다. 내년 4월 총선만 이기면 된다는 생각이겠지만, 이래선 선거 승리는커녕 아무런 정책 레거시를 남기지 못할 것이다. 정부여당에서 누군가는 대통령에게 솔직하게 얘기하고, 내부 토론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대기자 pcs@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