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보다 경제? 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관광 성지 된 사우디
이슬람 리더 자임하는 사우디 이례적 행보
관광 산업 절박한 빈살만의 ‘위험한 도박’ 평가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보유한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들의 관광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이슬람 교리에 의문을 표하기만 해도 강력하게 처벌하는 사우디가 다른 종교에 문호를 개방한 이례적인 현상이다.
변화의 중심엔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있다. 종교 신념보단 경제를 중시하겠다는 빈살만 왕세자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평가와 함께 절대왕정 체제의 안정을 담보로 건 위험한 도박이라는 시각도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25일(현지시간) “보수적인 이슬람 왕국의 새로운 시대를 맞아 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열광적인 사우디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NYT에 따르면 모세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출애굽)한 뒤 여호와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시나이산이 이집트가 아닌 사우디에 있다고 믿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주요 관광객이다.
이들이 시나이산이라고 주장하는 곳은 사우디 북서부에 있는 자발 알라우즈산이다. 미국 캔자스주 출신 목회자로 자발 알라우즈산에서 수년째 가이드로 일하고 있는 조엘 리차드슨은 1인당 5199달러(약 680만원)짜리 성지 순례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투어 참가자 대부분은 회계사·변호사·의사 등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다.
미국 주류 신학자들은 시나이산이 사우디에 있었다는 이들의 주장을 ‘이단’이라고 비판하지만, NYT는 “출애굽의 진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순례자들의 열정을 꺾을 순 없다”고 표현했다. 자발 알라우즈산을 찾은 회계사 크리스 깁슨은 NYT에 “평생 지켜온 믿음을 내 두 눈으로 확인했다”며 감격했다.
기독교 내에서도 갑론을박이 펼쳐지는 이 투어에 대해 정작 이슬람의 리더를 자임하는 사우디 당국은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다. NYT는 “공개적으로 이슬람 외 종교 교리를 전파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주술로 여겨 처형까지 했던 사우디”라며 “한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초현실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사우디의 이런 변화는 2000년대 많은 사우디인이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돌아온 이후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했고, 2015년 빈살만 왕세자가 사우디 실권을 장악하며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빈살만 왕세자는 석유 중심의 경제 체제를 탈피하겠다며 관광 산업 육성을 주요 키워드로 꼽았다. 특히 초대형 미래 신도시 건설사업인 ‘네옴시티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었는데, 자발 알라우즈산이 바로 네옴시티 건설 부지 근처라는 점이 빈살만 왕세자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NYT는 “물론 사우디 당국은 사막 탐험가 중심의 관광객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하고 여행 프로그램을 계획했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사우디를 방문할 줄은 몰랐다”면서도 “‘낙후와 야만’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행위를 허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복음주의 기독교인 외에도 지난해엔 불교 승려들이 사우디에서 열린 종교 포럼에 참석했고, 유대인 관광객들은 최근 이슬람 성지인 메디나에 야자나무를 심는 행사도 진행했다.
사우디 당국이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2018년 10월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정부가 등을 돌리자 빈살만 왕세자는 수도 리야드에 복음주의 기독교 대표단을 초청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압박했다. NYT는 “양국의 관계가 불안정할 때마다 빈살만 왕세자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지렛대로 활용했다”고 전했다.
한편에선 이슬람 리더를 자임한 사우디가 경제 이득을 위해 종교적 권위를 지나치게 쉽게 내려놨다는 평가도 나온다. 프랑스24는 “사우디 안팎에선 빈살만 왕세자의 번개 같은 추진력이 사회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결국 불안정을 촉발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고 전했다.
손우성 기자 applepi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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