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잘’ 안보현-신혜선, “인생은 더 이상 통속하지 않다”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김재동 객원기자]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피천득, ‘인연’)
그 여자는 사고처럼 불시에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법정에 선 검사처럼 추호도 봐줄 생각 없다는 듯 낯익힘을 강요했다. 당황하건, 외면하건, 경고하건 아랑곳하지 않고 모래성을 쓸어버리는 밀물의 기세를 담아 단호하게 추궁했다. “나랑 사귈래요?”
tvN 토일드라마 ‘이번 생도 잘 부탁해’의 문서하(안보현 분)는 반지음(신혜선 분)이란 여자로 인해 혼란스럽다. 이상한 여자다! 동시에 신기한 여자다!
일단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나타난다. 가령 그녀가 야심한 밤 윤초원(하윤경 분) 집 앞 골목에 나타날 이유는 뭔가? 그리고 가로등 밑에서 누구라도 안은 양 혼자 블루스라도 추는 듯한 저 행태는 또 뭐고? 게다가 돌려세웠을 때 뺨을 구르고 있는 눈물은 왜 서럽게 가슴을 찔러오는 거지?
그러더니 맥락없이 고백한다. “반지음이 문서하를 많이 좋아해요!” 놀라운 건 이 여자의 이런 낯섦, 이런 생경함이 싫지 않다는 점이다. 편의점을 찾아 컵라면을 함께 먹을만큼은.
그런데 이 방심할 수 없는 여자는 그 자리에서도 엉뚱한 소리를 이어간다. “문득문득 제 생각 나면 말해 주세요. 지금 전무님 보아하니 저한테 입덕하셨어요.” ‘아니거든!’ 부정하자마자 당황할 틈도 없이 제 귀를 가슴에 들이댄다.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는데?”라며 올려보는 그 시선이라니.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준 건 전적으로 아찔하게 사로잡는 그 눈빛 때문 이었다.
확실히 그 자리서 그녀를 뿌리치고 나섰다. 그랬는데 도심 곳곳 전광판 마다에 대문짝만한 얼굴을 들이밀고 “좋아해요” “이번 생엔 그러려고 태어났어요”운운.. 옆에 없어도 있고 있어도 있는 반지음 때문에 문서하는 곤혹스럽기만 하다. 이게 바로 그녀가 말한 ‘입덕 부정기’ 증상인가?
그런 그녀가 가끔은 한 번씩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 눈길은 아득하게 느껴진다. 마치 아주 먼 데, 아주 오래 전을 헤매이는 듯이. 그 시선을 접할 때면 가슴이 저미곤 한다. 마치 오랜 그리움처럼 다가오는 그 감정에 놀라 갈피를 잡을 수 없곤 한다.
그녀에게 무덤처럼 가슴에 묻어두었던 어린 시절의 두려움을 고백한 건 가누지 못한 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쑥불쑥 그녀를 통해 투영된 이제는 세상에 없는 누나 모습 때문이었다.
누나. 주원 누나. 내 어린 연인, 엄마 없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던 나의 사랑스런 보호자!
악몽은 놀이공원 가는 길을 덮친 덤프트럭이었다. 상관없을 줄 알았던 세상의 종말은 그렇게 삽시간에 닥쳐왔다. 그 순간 감싸 안아온 누나의 온기를 기억한다. 하지만 끔찍한 순간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끔찍한 순간이 엄습했다.
서하는 잔인하게도 그 순간을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누나의 체온은 식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온기가 남아있지 않게 됐을 때 구조대는 누나를 꺼내 갔다. 구조대의 건조한 손길은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 손목마저 앗아갔다. 서하에게 누나의 자취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문서하의 세계도 그렇게 닫혔다.
반지음이 윤초하의 도움을 받아 술에 취한 서하를 침대에 눕혔을 때 잠결의 서하는 반지음의 손목을 잡고 보챈다. “가지 마, 누나!” 그리고 얼굴을 굴러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서하가 운다. 윤주원(김시아 분)이 그렇게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았던 서하가 운다. 외로워서 운다. 윤주원이 떠난 세상, 혼자 내동댕이쳐진 그 서하가 운다.
비록 19회차를 살며 ‘인생은 그저 통속할 뿐’인 반지음이지만 결심할 수 밖에 없다. 윤주원을 잊게 해줄 누군가 없다면 불행으로 마감할 서하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19회차 ‘반지음의 인생’엔 보다 진정을 담아야겠다.
그러므로 반지음이 문서하에게 제안한 세 번의 고백이 앞으로 드라마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다. 그 고백을 받아들여 문서하가 과연 윤주원 없는 세상 속을 활개치고 살게 될 지, 그래서 윤주원으로 실패한 약속을 반지음이 지켜낼 지, 반지음의 성공을 응원하게 된다.
버려진 강아지 같이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안보현의 연기와 20대에 걸맞는 해사한 얼굴로 인생 19회차의 능청스러움을 연기하는 신혜선의 연기가 드라마 전체의 정조와 감흥을 매끄럽게 조율하고 있어 참 볼만한 드라마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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