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서울’에 실렸던 실험미술…50년 전 불온한 그들의 귀환

노형석 2023. 6. 26.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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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차린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의 전시장 들머리 모습이다. 고 정강자 작가의 입술 모양 조형물 <키스미>가 놓였다. 1967년 처음 만든 뒤 망실됐다가 2001년 다시 제작했다. 노형석 기자

50여년 전 그들은 외치고 몸부림쳤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중반 사이 한국 미술계를 강타하면서 불꽃처럼 피어났던 실험미술 운동은 답답한 시대를 향한 청년 작가들의 절규와도 같았다. 서울과 지방 각지에서 오리진, 신전, 에이지(AG), 에스티(ST), 4집단, 혁, 에포크 등의 동인 단체를 꾸려 활동했던 그들은 기성 미술의 죽음을 주장했다. 한강다리 아래 강변에 구덩이를 파서 목만 내놓고 스스로를 파묻었고, 자신들의 몸을 감은 비닐천을 불태웠다. 신문지 주요 기사를 오려내어 활자들을 털어내기도 했다. 국가전람회(국전)의 권위에 기대어 밀실에서 수상작품을 뒷거래하고, 서구 추상사조를 내세워 첨단 행세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화단의 권력이 되어 안주하는 선배들에 대한 환멸과 실망이 원동력이었다. 실험미술에 가담한 작가들은 평평한 화폭의 회화나 덩어리진 조각이 아닌, 다른 어떤 물질이나 비물질적인 것들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산업화 시대의 플라스틱 일상용품이나 잡동사니, 물과 얼음 등을 끌어와서 입체 작품을 만들었고 중얼거리거나 몸짓하는 순간들을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일종의 반미술, 개념미술 운동을 펼쳐나갔다.

기성 미술계와 언론은 이해하지 못했다. ‘괴짜 예술가’ ‘미친 짓을 벌이는 기행집단’ ‘발광자’ 등으로 몰아갔고, 군사독재 정권은 아예 ‘풍기문란사범’이나 ‘불온세력’으로 낙인찍기도 했다. 그들의 작품 발표 무대가 전시장과 미술관이 되지 못하고 사실상 <선데이서울> 같은 풍속잡지의 가십 지면이 되어야 했던 이유다. 남녀의 누드 퍼포먼스나 시내 고궁 담벽이나 건물 등을 천으로 둘러싸는 퍼포먼스 등은 당국의 요시찰 감시대상이 되어 철거와 연행을 각오해야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의 지하 공간 전시장. 1971년 한국 아방가드르 협회(AG) 전’의 ‘AG’포스터를 깃발처럼 늘어뜨린 송번수 작가의 작품과 이승택 작가의 조형물 <종이나무>가 천장에 매달려있는 모습이다. 전시장 가운데는 나무가 땅에 뿌린 내린 단면을 그대로 떠낸 이건용 작가의 설치작품 <신체항>이 놓였다. 노형석 기자

50여년이 지나 당대 ‘돌아이’ 예술가들의 옛 난장 작업들이 한국 현대 미술판에서 새롭게 소환되고 있다. 질식할 것같은 소통부재의 시대상을 은유하는 숱한 기행 퍼포먼스와 반미술 작업으로 당대엔 기존 화단에서 조롱과 무시를 당했던 당대 실험미술 작가들-이승택, 성능경, 이건용, 김구림, 정강자, 정찬승, 이강소 등등-이 최근 되레 서구 미술계에 주목을 받으면서 한국 미술판에서도 이들의 과거 작업들과 활동 자취들이 재조명되는 참이다. 2010년대 이후 박서보, 하종현 등 원로 작가들의 벽지 같은 단색조 회화(모노크롬)에만 치중해왔던 한국 미술시장도 최근 수년간 실험미술 작가들의 옛 작업들과 근작들을 주시하면서 모처럼 60~70년대 한국 현대미술사 담론이 활기를 띠는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실험미술은 사실상 외면받는 상황이었다. 미술판의 변방에서 대안세력을 형성했다가 제도권 화단의 추상회화에 결국 흡수되어 버린 미완의 모색 정도로 치부되었던 까닭이다. 그러다 2001년 작업들을 처음 체계적으로 갈래지어 소개한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미술사 기획전 ‘전환과 역동의 시대’와 2004년 주요 명작들을 후대 작품들과 함께 놓고 동시대성을 처음 부각시켰던 토탈미술관의 문제적 기획전 ‘당신은 나의 태양’전이 단초가 되어, 재조명 시도들이 여럿 나타나게 된다. 2010년 경기도미술관의 ‘한국의 개념미술-팔방미인’ 전과 2016년 부산비엔날레 프로젝트 전 ‘한국의 전위예술: 불온한 탈주’는 이런 흐름에 가속을 붙였고, 10여년간 메이저화랑인 갤러리현대도 이승택, 이건용, 이강소, 곽덕준 등의 주요 작가들을 개인전 등에서 잇따라 소개했다. 이렇게 점차 재조명 흐름이 뚜렷해지던 상황에서 2년 전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이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을 공동기획해 열기로 했다고 발표하면서 실험미술 다시 보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특히 올해는 실험미술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열기가 고조되는 중이다. 1970년대부터 비물질적인 개념미술 작업을 지속해오면서 물밑 명성을 쌓은 성능경 작가가 마침내 작업을 결산하는 회고전·근작전과 퍼포먼스 등의 굵직한 성과들을 잇따라 쏟아내면서 가장 뜨거운 작가로 주목받았다. 2년 전 국립현대미술관이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과 함께 열기로 한 공동기획전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도 지난달 국립미술관 서울관에서 개막(7월16일까지)해 올가을에는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으로 건너가 순회전을 벌이게 된다. 70~80년대 한국 제도권 모더니즘 미술 진영의 대표적 이론가였던 이일(1932~1997)의 유족이 만든 스페이스21 갤러리도 이일이 실험미술의 유력한 결집체로 1969년 작가들과 결성한 에이지(AG)그룹(한국 아방가르드 협회)의 아카이브 기획전을 최근 열어 미술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서울 스페이스 21에서 열린 ‘평론가 이일과 1970년대 에이지(AG)운동’ 전의 전시장 일부. 벽에 여러개의 스프링 오브제를 고정시킨 하종현 작가의 70년대 작품이 내걸려있고, 바닥에는 <핸들>이란 제목을 붙인 박석원 조각가의 조형물이 놓였다. 노형석 기자

하지만 담론이나 전시의 얼개 측면에서 보면 부실하고 부족한 점이 적지않다. 가장 큰 실험미술 기획전인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 ‘한국 실험미술…’이 당장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이 전시는 6전시실의 1층과 지하층, 7전시실에 김구림·성능경·이강소·이건용·이승택 등 주요 작가 29명과 대표작 90여점, 관련 자료 30여점을 펼쳐놓았다. 설치작품과 깃발 형식의 오브제 작업, 1960~70년대 온갖 방식으로 펼쳐진 전위 작업들을 한자리에 모아 역사화를 시도한 것은 의미가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작가들이 생존해있는 상황에서 작가별·그룹별·작업 영역별로 유물들처럼 작품들을 단순 진열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관점상의 한계가 뚜렷했다는 평가다.

90년대 이후 학계 연구 상황은 물론이고, 지대한 영향을 미친 60~70년대 일본 전위미술과의 관계, 지방 전위작가들의 활동 양상 등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은 전시 기획에서 큰 결함으로 지목된다. 미술계에서는 2001년 국립미술관이 기획한 `‘전환과 역동…’전의 재탕이라거나 ‘화석화한 전시’라는 지적과 함께 예정된 미국 순회전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성능경·이승택·김구림 등 상당수 참여 작가들이 당대 영상과 개념적 조형물 등에서 보여줬던 사회적 문제 의식과 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일본 현대미술 운동과의 연관성 등에 대한 심층적인 논의가 학계에서 거의 진전되지 못한 점 등도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미술사연구자인 김복기 경기대 교수(미술전문지 <아트인컬처> 주간)는 “60년대 말 실험미술 운동이 왜 태동했는지에 대한 미술사적 검토와 더불어 지금 한국 현대미술 작업들과 어떤 맥락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한 동시대성 탐구가 절실하다. 미술계는 물론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공공미술관들이 기존 작가들과 크게 다른 실험미술 작가들의 기록과 사진, 영상 등에 대한 아카이브 보존 방향을 세우는 데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짚었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968년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의 전위예술가들이 양화대교 아래 한강변에서 벌인 퍼포먼스 <한강변의 타살> 실연 장면.
성능경 작가의 1970년대 전위적 사진 작업의 결과물중 하나인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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