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한국 자본주의는 새로운가

송영규 선임기자 2023. 6. 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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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규 선임기자
기후변화·고령화·불평등 등 난제
국가·기업 힘만으론 대처 힘들어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이루려면
노사·민관 협력 등 공존 추구해야
[서울경제]

요즘 미국에서 논란이 되는 단어가 있다.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 최근의 인플레이션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일어나는 게 아니라 기업의 탐욕(Greed)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다. 미국에서 소비자들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고통 받던 시기에도 기업은 지난해 1조 8000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가져갔다는 소식이 논쟁에 불을 붙였다. 소시에테제네랄의 앨버트 에드워드 글로벌 전략가같은 이는 “그리드플레이션이 끝나지 않으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볼 지도 모른다”라고 경고한다.

그리드플레이션의 옳고 그름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덕목은 이윤’이라는 자본주의의 정통적 시각에, 기업의 이익이 소비자들이 겪는 고통의 결과라면 과연 이것이 건강한 자본주의인가 하는 질문을 그리드플레이션이 던졌다는 것이다.

2021년 일본을 이끌 새로운 최고지도자로 뽑힌 기시다 후미오 총리. 취임 직후 그가 가장 먼저 꺼내든 정책은 ‘새로운 자본주의(New Capitalism)’였다. 얼마 전에는 ‘새로운 자본주의 시즌 2’까지 제시했다. 초점은 ‘사회적 문제 해결과 경제 성장의 동시 실현’이다.

첫 번째 스텝은 임금 인상 등을 통한 분배 기능 강화. 얼핏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민관 연대를 통해 인공지능(AI)과 양자, 그린에너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에 대한 투자를 강화한다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오면 차이가 분명해 진다. 기업을 미래 산업으로 이끌어 경쟁력을 강화하고 거기서 나온 이익을 임금 상승으로 연결한다는 것이다. 고임금은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강력한 유인이다. 노동 유연성 강화라는 세 번째 결과물을 기대하는 이유다. ‘기업 경쟁력 강화→ 이익 확대→임금 상승→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순환 고리의 완성이 기시다 총리가 제시하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자본주의를 바꾸려는 시도는 이 뿐이 아니다. 주주만이 아니라 직원·투자자·사회·정부에 이르는 모든 이들의 이해를 포괄한다는 이해관계자자본주의에는 미국 181개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동참했다. 수익만이 아니라 사회나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업 또는 기업에 투자하는 임팩트 투자도 등장했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여러 형태로 리모델링 되고 있다.

이들이 외치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반대로 자본주의를 지속가능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갈수록 심화하는 사회 양극화, 점점 더 심각해지는 기후 변화, 언제 나라가 사라질 지 모르는 인구 감소, 미래 세대를 위협하는 고령화 등은 어느 한 국가나 기업, 또는 개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제들이다. 모두 힘을 합쳐 대응해야 하는 것들이다. 기업과 노동자, 민간과 공공, 인문과 과학이 손을 잡고 나가지 않는다면 공멸에 이를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새로운 자본주의를 불렀고 이해 관계자들을 기업 주위로 모이게 했다. ‘공존’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한국의 상황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엄중하다. 출산율은 2012년 1.3%에서 10년이 지난 지난해 0.73명까지 떨어지며 수년째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하락 속도다. 청년 체감 실업률은 올해 20%를 넘어섰고 자살률과 노인 빈곤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어느 것 하나 심각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가뜩이나 기후변화, 인종 갈등 등 세계적 난제도 힘겨운데 한국 사회 자체의 문제까지 덧붙여졌으니 한국 자본주의가 직면한 과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무거울 수 밖에 없다. 노사와 민관, 노인과 미래 세대 모두가 문제 해결을 위해 힘을 모아도 될까 말까 하다. 하물며 머리띠를 두르고 투쟁을 외치는 것이, 임금 인상은 무조건 악이라고 외치는 것이 해법일 수는 없다. 이념에서 벗어나 공존의 힘을 찾아야 한다. 젊은 정치인, 임팩트 투자와 소셜 벤처 투자자들, ‘탈이념’의 MZ 노조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를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은 바로 이들에게 있다.

송영규 선임기자 sk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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