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낙태권 폐기 1년, 찬성 25州 vs 반대 25州… 내년 대선 뇌관으로

뉴욕/정시행 특파원 2023. 6. 26.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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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등 전역서 집회, 보수·진보 충돌
지난 24일 미국 워싱턴의 연방대법원 앞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 1년을 맞아 낙태 찬성론자들과 반대론자들이 각각 집회를 벌이다 말싸움을 벌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에서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전국 단위 판례가 폐기된 지 1년이 되도록 후폭풍이 계속되고 있다. 미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가장 첨예한 이슈인 낙태 문제를 두고 곳곳에서 ‘전쟁’이 계속되면서, 2024년 대선을 좌우할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24일(현지 시각) 미 워싱턴DC와 뉴욕 등 전역에선 낙태 허용을 둘러싼 찬반 집회가 이어졌다. 각지에서 “할머니와 엄마가 했던 시위를 내가 다시 해야 하느냐” “총기나 규제하라, 내 몸을 지배하려 들지 말라”는 낙태 찬성론자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생명 보호가 우선” “더 이상 아기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반대론자들의 피켓과 구호가 대립했다.

1년 전 이날 미 연방대법원은 전국적으로 모든 여성을 대상으로 임신 6개월 전까지 낙태를 합법화한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반세기 만에 공식 폐기하고, 각 주(州)가 낙태 제한 혹은 허용 여부를 정하도록 했다. 1년이 지난 지금 50주 중 절반인 25주에서 낙태를 금지 또는 제한하는 법이 줄줄이 발효·제정됐다. 주로 텍사스·플로리다·앨라배마·아칸소·조지아 등 보수 성향이 강한 남부와 중부 내륙 주들이다.

24일 미 워싱턴DC의 연방대법원 앞에서 낙태권 보장을 주장하는 시위대가 미 국기에 옷걸이, 그리고 흰 드레스에 핏자국을 그려놓고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구호를 적은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이는 과거 20세기 초중반 낙태권 보장 이전 여성들이 철제 옷걸이 등을 이용해 불법 낙태 시술을 하다 목숨을 잃었던 일을 상징한다. /UPI 연합뉴스

AP통신 등에 따르면 현재 미 15~44세 가임기 여성 약 7000만명 중 2500만명이 1년 전보다 낙태가 더 어려워진 상황에 처했다. 특히 4분의 1에 해당하는 1750만명은 성폭행이나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 등 어떤 경우에도 낙태가 사실상 전면 불허되는 곳에 살고 있다. 미국은 세계 주요 민주주의 국가 중 낙태 규제가 가장 심한 나라가 됐다.

그러나 미국에서 지난 1년간 낙태 건수가 줄거나 그 덕에 출생아가 많아졌다고 보기 힘들다. 뉴욕·캘리포니아·미시간 등 낙태가 합법적인 나머지 절반의 주에서 “여성의 기본권을 보호하겠다”며 낙태 접근권을 정책적으로 더욱 확대, 낙태 시술 클리닉이 이전보다 더 늘고 경구용 낙태약 사용도 급증하는 ‘풍선 효과’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낙태가 불법화된 주들에 섬처럼 둘러싸인 중부의 일리노이주와 콜로라도주는 각각 인근 주의 임신부들이 수백㎞를 달려오는 ‘낙태 성지’가 됐다.

미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폐기 1년을 맞아 24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낙태 반대론자들이 '생명을 지키는 아빠들' '생명을 지키는 엄마들' 등의 구호를 내세우고 어린이들과 함께 낙태권 규제 강화를 주장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일리노이주는 중북부 지역에서 낙태가 여전히 합법인 '중부의 낙태 성지'가 된 곳이다. /AFP 연합뉴스

미 전역에 미페프리스톤 같은 경구 낙태약을 우편으로 배달하는 시민단체 ‘에이드 액세스’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약 배송 요청이 2배 늘었다고 한다. 뉴욕주는 최근 뉴욕 내의 의료진이나 단체가 낙태가 불법인 주에 낙태약을 보내거나 시술을 해도 처벌받지 않도록 하는 법까지 만들었다. 이에 낙태 반대 단체들은 식품의약국(FDA)의 미페프리스톤 승인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각 주의회에 낙태 규제법 위반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 제정 등을 요구하며 맞서고 있다.

이 ‘낙태 전쟁’에서 더 분노하는 쪽은 ‘이미 누리던 권리’를 빼앗긴 쪽이다. 여성들을 중심으로 진보층은 물론 중도층과 보수 일부 계층에서도 보수 우위 대법원의 낙태권 폐기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하다. 최근 퓨리서치센터의 여론조사에서 미 국민 중 낙태 찬성 비율은 62%, 반대는 38%였다. 로이터통신과 여론조사기관 입소스의 공화당 유권자 대상 조사에서도 낙태 찬성이 45%로, 반대(44%)를 오차범위 내 앞섰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바이든 정부에 대한 심판론이 먹히지 않은 것도 바로 보수 우위 대법원의 낙태권 폐기 결정이 공화당에 역풍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은 전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보수 대법원의 낙태권 폐기 1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23일 워싱턴DC의 한 정치행사에서 "정부는 여성의 생식건강에 대한 접근권을 보호할 것이며, 의회가 '로 대 웨이드'의 보호를 연방법으로 완전히 복원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히고 있다. /EPA 연합뉴스

민주당은 낙태 규제에 대한 분노를 내년 대선과 연방의회 선거까지 끌고가겠다는 전략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24일 성명을 내고 “1년 전 오늘 연방대법원은 미 전역 여성들의 선택권을 부정하고 미 국민의 헌법적 권리를 박탈했다”며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공화당은 전국적으로 낙태 시술을 금지하고 낙태약조차 시중에서 못 팔게 하는 극단적이고 위험한 의제를 추진 중”이라고 했다. 바이든과 민주당은 “대법원이 낙태 허용 여부를 각 주에 맡겼지만, 민주당이 상·하원을 장악하게 되면 낙태권을 전국 단위에서 일괄 보장하는 연방법으로 되살릴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픽=양인성
그래픽=양인성

반면 공화당은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한 보수 핵심 지지층의 결집을 위해 낙태 규제엔 원칙적으론 찬성하지만, 이를 대선 쟁점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고심 중이다. 공화당의 내년 대선 경선 주자로 1·2위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낙태를 전면 금지하는 연방법 추진 여부에 대해 확답하지 않고 있다. 현 공화당 주자 중 낙태 전면 금지를 명확하게 밝힌 이는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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