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공급망 흔들 수 있는 기업 국유화… 반도체 패권 노려
일본 국부펀드인 산업혁신투자기구(JIC)가 매수에 나선 JSR은 반도체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되는 포토레지스트 분야 글로벌 1위 기업이다.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웨이퍼에 정밀한 회로를 그려넣는 노광 공정의 소재로 일종의 감광액이다. 특히 JSR은 전 세계에서 5나노(nm·1nm=10억분의 1m) 이하 첨단 반도체 생산에 사용되는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를 공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업이다. 심지어 경쟁사들도 도쿄오카공업, 스미토모화학, 신에쓰화학 등 대부분 일본 기업이다. JSR을 사실상 국유화한 일본 정부가 포토레지스트 수출 통제에 나설 경우 글로벌 첨단 반도체 공급망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TSMC도 예외가 아니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JIC의 JSR 매수는 글로벌 반도체 소재 시장에서 일본 정부의 입김이 그만큼 세진다는 뜻”이라고 했다.
◇치밀한 반도체 부흥 전략
반도체 업계에서는 JIC의 JSR 인수가 일본 정부의 치밀한 반도체 부흥 전략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1980~199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제패했던 일본은 미국의 견제를 받으며 생산 기반이 완전히 무너졌다. 차량용 반도체 기업 르네사스와 낸드플래시 업체 키옥시아를 제외하면 뚜렷한 반도체 생산 업체가 없다. 하지만 반도체 소재·장비와 후공정(패키징)에서는 여전히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국내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한국과 대만 중심으로 생산 거점이 재편되는 와중에도 일본 소재·장비 업체들은 30년간 기술력을 높여가며 꾸준히 공급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켜왔다”면서 “장비만 놓고 보면 미국과 네덜란드, 소재의 경우에는 독일도 강국이지만 모두를 갖춘 국가는 일본뿐”이라고 말했다.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일본 업체들의 반도체 장비·소재 글로벌 점유율은 도포 장치 90%, 실리콘 웨이퍼 60%, 포토레지스트 70%에 이른다. 2019년 일본 정부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반발해 반도체 핵심 소재 3개 품목을 수출 규제한 것도 이런 자신감에서 비롯됐다.
실제로 일본은 최근 반도체 소재·장비를 전략물자로 삼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다음 달 23일부터 노광 장비, 세정·검사 장비 등 23품목에 대해 수출 시 경제산업상의 허가를 반드시 받도록 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대중 수출 제재에 동참하는 모양새지만,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보이려 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일본의 수출 통제는 범용 반도체의 제조 자체를 어렵게 하는 파괴적인 정책”이라고 했다. 반도체 생산은 3~4년마다 반도체 장비를 바꾸고 공정 전체를 재조정해야 하는데, 일본이 장비·소재 수출을 막으면 해외 기업은 업그레이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중 규제에 말을 아끼던 중국 상무부가 “일본의 수출 통제는 반도체 공급망을 불안하게 만들고, 양국 기업들의 이익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조치”라고 맹비난할 정도였다.
◇후공정 능력도 세계 최고
일본 정부는 자국의 후공정(패키징) 경쟁력도 공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반도체 후공정은 삼성전자와 TSMC 등이 웨이퍼에 찍어낸 반도체에 외부 단자를 연결하고 포장(패키징)하는 작업이다. 최근 각종 반도체를 연결해 성능을 높이는 첨단 패키징 기술이 주목받으면서 반도체 업체들의 격전지로 급부상하고 있는데 일본이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2021년 6월 수립한 ‘반도체 전략’ 문건은 “도쿄대와 도호쿠대, 오사카대 등의 우수한 후공정 연구 능력을 TSMC 같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 유치에 활용해야 한다”고 했고, 이는 일본 정부의 보조금 지급과 시너지를 내면서 현실화됐다.
TSMC는 일본 구마모토에 후공정 연구소와 공장을 건설하고 있고, 삼성전자도 300억엔(약 2971억원)을 투자해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 후공정 시험 라인과 연구시설을 짓기로 했다.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는 “소재·장비, 후공정 같은 현재의 경쟁력과 지정학적 이점을 앞세워 한국과 대만을 대체하는 반도체 거점이 된 뒤, 대기업 연합체인 라피더스를 앞세워 첨단 반도체 직접 생산에 나선다는 것이 일본의 로드맵”이라며 “공급망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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