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나는 너보다 더 힘들어야 한다

기자 2023. 6. 26.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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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결혼하기 전, 그는 결혼해 봐야 진짜 힘든 삶이 시작된다고 했다. 내가 결혼을 하자, 그는 애가 있어야지 진정한 고생이라고 했다. 내게 아이가 생기자, 그는 하나일 땐 어떻게든 살겠는데 둘이니 장난 아니라면서 하나면 행복한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내게 또 아이가 생기자, 그는 딸은 생각보다 손이 안 간다면서 연년생 아들 둘 키우니 죽겠다고 했다. 내가 월세 살 때, 그는 2년마다 전세금 오르는 거에 비하면 월세는 큰 부담 아니라고 했다. 내가 전세 살 때는, 전세는 자기 돈 돌려받기라도 하지 은행 대출 잔뜩 받아 이자는 꼬박꼬박 내는데 집값이 오르지 않으면 얼마나 초초한지 아냐고 했다.

오찬호 <민낯들: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저자

몇 년마다 만나는 그는 자신이 조직 안에서 겪는 갈등을 말하기 바빴다. 나는 그래도 상대를 포기하지 말라고 넌지시 반응한다. 그때마다 그는 이랬다. 서른 살일 때는, 나이 서른 먹고 사람이 쉽게 변하냐면서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다고 했다. 서른아홉 살이 되었을 때는 곧 마흔인데 줏대 없이 일희일비하는 거 아니라면서 소신대로 살겠다고 했다. 사십대 중반이 넘어가니, 나이 오십이 다 된 사람에게 조언 말라면서 화를 냈다. 그렇게 살아놓고 “앞으로는 간섭받지 않고 살겠다!”라고 선언한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던 그는 대기업에서 돈 많이 받는 사람이 어떻게 같은 노동자냐고 했다. 대기업으로 이직해서는 실적 고민도 없이 그냥 시키는 대로 일했던 과거가 편했다면서 지금은 피가 마른다고 했다. 경기도에서 광역버스로 출근할 때는 겨울철 퇴근시간에 사당역에서 버스 기다려 보지 않았다면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고, 서울 외곽으로 이사와 지하철을 이용할 때는 지옥철 타본 사람만 월급쟁이의 비애를 안다고 했다. 프리랜서가 된 그는, 출근해서 어떻게든 버티면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사람이 무슨 고민이냐고 했다. 직원 몇 명을 둔 사장님이 되어서는, 살아보니 가장 큰 공포는 직원들 월급날이 다가올 때 느낀다면서 자기 사업 안 해 본 평범한 사람은 평생 알 수 없는 삶의 무게라 했다. 직원이 투덜거리면 이렇게 나무란다. “나라라도 구해?”

“나보다 더 힘드냐”, 그는 항상 이렇게 말을 시작하고 타인의 하소연을 단칼에 끊는다. “나도 힘든데, 더 힘들어 보이네”라는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하고 개개인의 삶을 꼭 수직으로 비교해 상대의 고충을 징징거림으로 규정하고 무안을 준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경험을 들을 때, 그러니까 도무지 끼어들 수준이 아닌 판에서는 곧잘 이런다.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해, 긍정적으로 생각해.” 그리고 뒤돌아서는 ‘저 인간 너무 피곤하다’라고 수군댄다. 자기계발서를 보면, 공감능력 없는 사람은 절대로 잘 살지 못한다는데 항상 자신이 중심인 그는 잘 산다. 아니, 못 사는 줄 모른다.

당신은 어떤 그인가. 물론 나도 그다. 초등학생인 둘째가 월요일은 학교 가기 싫다고 하니, 나는 고작 열 살이면서 뭐가 힘드냐는 투의 말투를 숨기지 못한다. 푸념하는 둘째에게 그 시절이 좋은 거라며 짜증 내는 중학생 첫째에게 나는, 앞으로 고생할 일이 차고도 넘쳤으니 까불지 말라는 표정을 드러낸다. 나라고 한국인에게 박힌 ‘나보다 더 힘드냐’ 유전자가 없겠는가.

오찬호 <민낯들: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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