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갑자기 나이 든 너구리가 되어
넷플릭스에 가입했다. 오래전 해적판 비디오테이프로 보았던 영화 한 편을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해적판이라고는 하지만 거칠거나 음란한 내용은 아니고, 밝고 동글동글하고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너구리들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다. 그들의 노래와 춤은 전형적인 어린이 만화영화처럼 익살스럽다.
하지만 이것은 싸움에 대한 영화다. 공격과 방어, 수비와 반격이 있으며, 전쟁과 전투와 작전이 나름대로는 있다. 심지어 몇몇 너구리는 두들겨 맞고 차에 치여 피를 흘리고 죽거나, 몇몇은 상대, 즉 인간을 살해하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긴박하고 거친 내용들은 꽤 능글맞게 봉합돼 있어 후반부에 다다를 때까지 두렵거나 서글프게 느껴지지 않는다. 너구리들은 포기하지 않고 두 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 내내 싸우고 또 싸운다. 어째 매번 좀 어설픈 실패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이라는 제목의 이 기묘한 영화는 1967년부터 시작한 일본 도쿄 인근의 타마 뉴타운 사업을 배경으로 한다. 전후 경제성장과 더불어 우후죽순처럼 부동산 개발이 벌어졌고, 자연 속에서 느긋하고 행복하게 살던 너구리들은 쫓겨나게 된다. 그들은 싸울 것을 다짐하지만, 워낙 낙천적이고 모질지 못한 터라 끊임없이 뒤로 밀린다.
그러나 너구리들의 대반격이었던 ‘밤의 요괴대작전’은 아름다웠다. 멀리 시코쿠에서 나이 든 사범 너구리들이 도우러 온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원정 투쟁’이라고나 할까. 타마산의 너구리들은 도시의 밤을 온갖 요괴로 채운다. 하늘에는 거대한 용과 신선이 날며 비를 뿌리고, 땅에는 불을 뿜는 호랑이와 괴물들이 으르렁거린다. 너구리들은 겁을 주어 개발을 중단시키고 싶어 했지만 독한 인간들이 그 정도로 물러날 리 없다. 너무 많은 힘을 쓴 탓에 지쳐서 숨을 거둔 사범 너구리 앞에서 젊은 너구리들은 눈물을 흘린다.
그 이후는 짐작하는 대로다. 너구리들은 안간힘을 다해 각자의 방식으로 싸운다. 하지만 그들의 유일한 성과는 여론을 움직여 도심 속에 약간의 자연공원을 마련하도록 한 것 정도다. 하지만 공원은 숲도 산도 고향도 될 수 없다. 결국 너구리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무기인 변신술을 인간들에 섞여 살아가기 위해 쓴다. 숲을 그리워하며 회사를 다니거나 분식집에서 일하고, 심지어 쓰레기통이나 하수구를 뒤지는 너구리들도 있다. 고된 삶이다.
영화를 처음 본 20여년 전에는 딱히 이들에게 감정이입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영화는 한편으로 자연과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성 사회에 섞여 살아가게 된 옛 전공투 세대 운동권들에 대한 은유였기 때문이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당시의 내가 그들에게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솔직히 집회에서 종종 열리는 ‘문화제’도 좀처럼 납득하지 못했다. 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걸까. 저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다고 치면, 그다음에는 무엇이 바뀌나. 너구리들의 요괴대작전은 기발하고 멋졌지만, 결국은 무력하지 않았나.
그러나 얼마 전, 나는 갑자기 너구리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읽고 쓰고 책을 만드는 이들의 공간을 지키겠다며 1000여명이 모여들었고, 어느새 나이를 먹은 나는 ‘장로 너구리’ 정도 되는 처지였다. 워크숍과 마술, 추첨으로 한껏 흥겨워진 분위기에서 나는 무언가를 말해야 했다. 정확히는 내 입을 통해 나와야 하는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있었다. 그 말이 인간들의 귀에 가닿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일본 최대의 신도시 개발사업이었던 타마 뉴타운은 점점 공동화되고 있다. 산을 그대로 두고 너구리들과 함께 살았다면 어땠을까. 굳이 싸우고 피를 흘리는 대신 종종 요괴 퍼레이드라도 벌이면서. 인간 입장에서도 텅 빈 건물에 사는 것보다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도깨비불을 보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아마 집값도 덜 떨어졌을 텐데.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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