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우리의 자존심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2023. 6. 2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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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이 상해 못살겠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팸플릿을 보다가 나는 자존심이 상한다. 환경파괴로 악명 높은 기업들의 이름이 수두룩해서다. 명색이 환경영화제인데, 삼척 화력발전소 건설사인 포스코와 최대 투자자인 농협을 비롯해 현대·삼성·SK 등 대표적 ‘기후 악당’ 기업들이 후원 명단에 대거 포함돼 있다. 한국 환경영화 대상을 수상한 <수라>는 새만금 개발 과정의 국가폭력과 생태학살을 고발하는 영화인데, 영화제 후원기업에는 새만금 개발에 참여한 건설기업들도 있다. 기업들이 이를 ESG경영 지표를 높이고 친환경 이미지로 세탁하는 데 활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기업의 생태학살 범죄를 은폐하는 ‘그린 워싱’에 조력하는 행위라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영화제 집행위와 주관 기관인 환경재단은 별도의 공식적인 해명이나 입장 표명 없이 영화제를 진행했다. 영화 속의 수라가 아름다웠기에 영화 밖에서 일어나는 추악한 거래는 우리의 자존심을 더 상하게 한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환경영화제의 기업 홍보를 보다가 상해버린 마음은,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 명단에서 블랙리스트 사건 가담자(오정희)의 얼굴을 발견하고 또 상한다.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 파트너가 돼 꼼수로 국회의원이 된 이(용혜인)에게 한국 정치의 미래를 묻는 ‘창작과비평’ 200호 기념호를 보면서 자존심이 상하고, 복간한 ‘녹색평론’을 반갑게 받았다가 녹색당에서 위성정당 사태를 이끈 주역(하승수·이유진)의 글이 두 편이나 실린 것을 보고 자존심이 상한다.

전태일재단 사무총장(한석호)이 노동자들의 ‘반노동위원회’라 부르는 윤석열 정부의 상생임금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진보의 환골탈태를 말하고, 전태일재단 후원의날 행사에 노동자 투쟁에 강경대응을 강조하는 경사노위 위원장(김문수)이 초대받아 맨 앞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일도 그러하다.

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이런 일들을 ‘소동’이나 ‘해프닝’으로 치부되고 넘어가는 것과 당사자들의 침묵과 관련된 주변인들의 방조다. 대체 한국사회에서 블랙리스트는 무엇이었고, 위성정당은 무엇이었나? 블랙리스트는 사상을 검열하고, 문화예술 창작 행위를 탄압한 국가 범죄였고, 위성정당 사태는 소수정당에 대한 정치적 폭력이며 민주주의 파괴 공작이었다. 이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그냥 넘어가는 것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폭력’이고, 어제의 잘못을 용인함으로써 내일의 잘못을 저지를 용기를 주는 일이다.

한번 잘못했다고 영원히 죄인이 되고 사회에서 매장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복귀에는 반성이 필요하고, 이 반성이 사회적으로 수행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혼돈은 그간 시민사회와 진보운동이 불의한 수단으로 정의로운 결과를 이룰 수 없다는 원칙을 제대로 합의하고 세워오지 못한 결과다. 반성하지 않는 인사들과 권력에 부역하는 인사들에게 여전히 사회운동과 진보를 상징하는 대표성을 부여하는 것은 제발 그만하자. 여전히 진보운동과 노동운동의 장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활동하는 이들의 긍지를 훼손할 뿐 아니라 운동을 희화화하고, 대중의 냉소를 불러오는 일이다. 현재의 과오를 과거 운동을 통해 쌓은 경력으로 상쇄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화된 상징자본으로부터 인정과 명예를 정당하게 철회하는 것이 진보세력이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내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네요.” 우리가 지켜야 할 자존심이 어떤 것인지 목숨을 걸고 알려준사람이 있다. 노동조합의 정당한 활동을 ‘건폭’이란 이름으로 조폭에 비유하며, 무법천지 건설현장을 최소한 법이 작동하는 현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조합원과 활동가들을 업주를 갈취하는 조직 깡패로 매도한 정권에 맞서 분신으로 저항한 양회동 열사다. 그에게 집시법 위반도 아닌 업무방해와 공갈 혐의로 조사받는다는 것은 노동자로서의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노동자의 장례를 치르면서, 장례위원 명단에 친자본 반노동 정당 민주당과 당대표(이재명)의 이름을 버젓이 올린 행위는 열사의 뜻을 잇고자 하는 이들의 자존심을 짓밟는다.

그러나 인권활동가 미류는 경향신문 칼럼 ‘우리의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습니다’를 통해 ‘나의 자존심’은 ‘우리의 자존심’으로 다시 썼고, 저 말은 노동자의 긍지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금속노조 조선 하청 노동자 유최안의 말, ‘이대로 살 수 없다’가 지난해 ‘924 기후정의행진’에서 모두의 외침이 되었듯이, 양희동의 말도 모두의 다짐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의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이제 정말 용납하지 말자.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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