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 젖은 편지를 찢다
어떤 사랑도 오래 머물지 못했네
푸른 칼은 녹슬어 붉게 부스러지고
검은 팽나무 아래
내 젖은 손은 그대가 빠져나간 둥근
흔적의 가장자리만 더듬네
마을은 비어 있고
탱자나무 가시 울울한 내 마음의 자리엔
어떤 사랑도 오래 머물지 못했네
검은 팽나무 아래
내 젖은 편지를 찢네 오
내 검게 번져 읽을 수 없는 나날들을 찢네
노태맹(1962~)
이 시는 1995년 처음 세상에 나왔다가 최근 복간된 시집 <유리에 가서 불탄다>에 수록돼 있다. 시인은 여러 편의 시에서 ‘유리(羑里)’라는 공간을 그리워한다. 유리는 중국 주나라 문왕이 유배된 주역의 발상지면서 박상륭 소설 <죽음의 한 연구>에서 주인공이 기거한 곳이다. 사랑하는 그대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점(占)을 치거나 유리에 가면 그대를 만날 수 있다고 한 것에서 두 공간과 무관치 않다. 또한 유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머무는 상상의 공간이다.
이 시는 ‘젖은 편지를 읽다’의 후속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을 때, 내 손에 들려 있던 젖은 편지는 눈물에 “검게 번져 읽을 수 없”다. 태워버릴 수도 없는 편지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나눈 ‘나날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편지를 찢는다는 건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유리는 죽어야 갈 수 있는 마음의 감옥이다. 시인은 “어떤 사랑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고 선언하면서도 불에 타 재가 될지언정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김정수 시인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빗속에 모인 시민들···‘윤석열 퇴진·김건희 특검’ 촉구 대규모 집회
- 트럼프에 올라탄 머스크의 ‘우주 질주’…인류에게 약일까 독일까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사라진 돌잔치 대신인가?…‘젠더리빌’ 파티 유행
- “나도 있다”…‘이재명 대 한동훈’ 구도 흔드는 경쟁자들
- 제주 제2공항 수천 필지 들여다보니…짙게 드리워진 투기의 그림자
- 말로는 탈북자 위한다며…‘북 가족 송금’은 수사해놓고 왜 나 몰라라
- 경기 안산 6층 상가 건물서 화재…모텔 투숙객 등 52명 구조
- [산업이지] 한국에서 이런 게임이? 지스타에서 읽은 트렌드
- [주간경향이 만난 초선] (10)“이재명 방탄? 민주당은 항상 민생이 최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