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장마’ 소식에 포항 주민들 “아직도 작년 복구 안 끝났는데···”

김현수 기자 2023. 6. 25.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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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 제내리 주민 구정년씨(62)가 지난 20일 자신의 집에 새로 깐 장판을 걷어내고 있다. 장판 아래에는 습기를 막으려는 신문지가 덕지덕지 놓여 있었고, 신문지 틈 사이로 시커먼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김현수 기자.

“빗소리만 들어도 잠을 설쳐요. 역대급 장마가 온다는데…. 돈만 있으면 이사 가고 싶은 심정이죠.”

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 제내리 주민 구정년씨(62)가 지난 20일 자신의 집에 새로 깐 장판을 걷어내며 말했다. 그가 장판 끝부분을 살짝 들어 올리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장판 아래에는 습기를 막으려는 신문지가 덕지덕지 놓여 있었고, 신문지 틈 사이로 시커먼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구씨는 “(침수로) 시멘트가 물을 먹어 (습기가) 빠지지 않는다”며 “곰팡이를 제거하고 제거해도 그대로다. (수리를 포기하고) 아예 집을 비우고 나간 주민도 많다”고 토로했다.

이곳은 지난해 태풍 힌남노로 마을 옆을 흐르는 칠성천이 범람해 800여가구가 물에 잠긴 곳이다. 어깨높이까지 차오른 빗물에 몇몇 어르신들은 다락으로 피해 있다가 구조되기도 했다.

이곳에서 30년 넘게 거주한 한용욱씨(63)는 “며칠전 비가 오는 날에 옆집 할머니께서 유모차를 챙기시고 마당에서 비를 맞고 계셨다”며 “또 칠성천이 범람해 집 안으로 들이닥칠까 봐 불안해 나와계셨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이날 칠성천에는 하천 좌우 바닥을 깎아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하천 가장자리 등의 흙을 긁어내 폭을 넓혀 물이 잘 빠지게 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이 공사가 시작된 지는 며칠이 되지 않았다. 수해가 일어난 때는 지난해 9월. 장마를 앞두고 10개월 만에서야 첫 삽을 뜬 셈이다.

지난 20일 오후 경북 포항 남구 인덕동 인근 냉천. 제방 곳곳이 모래주머니로 응급 복구만 돼 있을 뿐 하천 정비 사업은 진행되지 않았다. 이 하천은 지난해 태풍 힌남노로의 영향으로 범람했다. 범람한 물은 인근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흘러 들어가 아파트 주민 7명을 숨지게 했다. 김현수 기자

한씨는 “장마가 오기 전에, 태풍이 오기 전에 제발 좀 (하천) 범람을 막는 공사를 해달라고 이야기해도 묵묵부답”이라며 “침수피해 지역이라고 소문나 집도 안 팔린다. 돈 없는 사람만 죽으란 소리”라며 울분을 토했다.

역대급 장마가 예보되면서 지난해 태풍 힌남노로 큰 피해를 본 포항지역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예산문제와 각종 행정절차 등의 문제로 수해복구작업이 더딘 탓이다.

경북도는 칠성천과 냉천 등 힌남노 내습 당시 범람했던 하천을 대상으로 재해복구 사업을 진행 중이다. 복구작업은 260억원을 들여 하천의 물길 확장과 제방을 보강하는 작업으로 2025년 완료할 예정이다. 지난해의 경우 예산문제로 응급 복구만 이뤄졌고, 올해는 설계와 환경영향평가 등의 절차를 거쳐 최근 착공에 나섰다. 통상 수해복구가 행정절차를 거쳐 착공하는 데 1년이 걸린다는 것이 경북도의 설명이다.

하지만 포항주민들은 근본적인 해결책 없이 앞으로도 두 번의 장마를 더 나야 한다고 우려하고 있다. 지난번 힌남노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면 언제라도 마을이 물에 잠길 게 뻔해서다.

김태숙 대송면 비상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사실상 방치나 다름없다”며 “돈 있는 마을 주민은 벌써 마을을 떠났다. 기후온난화로 인해 언제든 위기가 찾아올 수 있는 만큼 이주대책 등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대위에 따르면 이 마을에서만 70여 가구가 가족 집이나 월세 집을 구해 이사했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빼내려고 내려갔던 주민 9명 중 7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아파트에 설치된 길이 6.2m, 높이 1m의 물막이벽. 하지만 주민들은 사고 원인인 냉천에 대한 근본적 원인 해결없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차를 빼내려고 내려갔던 주민 9명 중 7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아파트에는 길이 6.2m, 높이 1m의 스테인리스 강판으로 제작된 물막이벽이 설치됐다.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오는 빗물을 막는 장치로 내·외부에서 버튼을 누르면 10~15초 만에 열리고 닫힌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 역시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아파트를 침수시켰던 것은 아파트 옆을 지나는 냉천이 범람한 탓이기 때문이다. 냉천 역시 칠성천과 같이 제방 곳곳이 모래주머니로 응급 복구만 돼 있을 뿐 하천 정비 사업은 이제 막 시작했다.

입주민 한모씨(50대)는 “역대급 장마에 역대급 태풍이 온다고 하는데 대책이라곤 물막이판뿐”이라며 “배수 대책도 없이 물막이벽만 세워 걱정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1973년 쇳물 생산을 시작한 이후 49년 만인 지난해 고로 가동이 중단된 포스코 포항제철소는 높이가 2m나 되는 콘크리트 물막이벽을 설치했다. 포항제철소 정문부터 냉천 옆 3문까지 약 1.9㎞ 길이다. 주민들은 이 물막이판에 막힌 물이 인근 저지대로 덮칠 수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포항시도 포스코 측에 ‘저지대 침수 우려가 커졌다’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포스코 측은 수해 이후 정부가 구성한 민관합동조사단의 권고에 따라 물팍이벽을 설치했고, 지난해 12월 포항시에 신고 절차를 거쳤다는 입장이다.

소방과 군 대원들이 지난해 9월6일 경북 포항시 남구 인덕동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실종된 7명에 대한 구조작업과 배수 작업을 하는 모습. 권도현 기자

기상청은 올여름 폭우를 불러올 수 있는 각종 기상 여건이 갖춰진 상황이라고 밝혔다. 현재 감시구역 해수면 온도는 이미 평년보다 0.5도 이상 높다. 이런 상황이면 엘니뇨가 생기는데 이는 국내 남부지방에 많은 양의 수증기가 공급된다. 비가 많이 내린다는 뜻이다.

현재 세계 평균 해수면 온도도 30년 평균치(1982~2011년)보다 1도가량 높은 20.9도를 기록하고 있다. 바다와 인접한 곳일수록 비구름이 형성되면 많은 양의 강수로 이어질 수 있다.

경북도 관계자는 “최대한 공사기간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제방을 쌓는 등 다른 대책도 마련해 피해를 방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h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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